고려청자의 탄생과 운지
중국의 월주가마에서 청자가 만들어졌을 무렵
다른 나라들은 자기를 만들수가 없었고 중국인들은 청자를 만드는법을
누구에게도 말해주지않았다 ㅂㄷㅂㄷ...
그러나 마침내 고려사람들도 청자를 만들수있게되었는데
사실 우리나라는 가야와 신라시대부터 도기를 만드는 전통을 가지고있었고
이미 높은 화도에서 구워내어 자연유가 생긴 도기들도 많아 녹유라는 초보적인
자기도 만들수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청자가 아니였기 때문에 고려사람들도 중국의 청자를 수입해서 썻는데
사용하다보니 고려의 사람들은 자신들도 청자를 만들고싶어 열심히 연구하고 실험하게되었다
그 시기가 9세기 중엽이라는 설도있고 10세기 후반이라는 설도있으니 언제인지는 정확히는 모르겠노
여하튼 10세기 후반부터 고려는 청자를 만들수있게 됐다 이기
서해안변인 슨라도 강진의 용운리가마,고창의 용계리가마에서 청자를 열심히 구워냈는데
이 가마터에 가보면 실패한 자기 파편이 언덕을 이루도록 쌓여있는것을볼수있다 얼마나 실험을 많이 했는지는 사진보면 RG?
이무렵 만들어진 대표적인 청자가 바로 <순화4년명 청자항아리>되시겠다 홀홀
<순화4년명 청자항아리>
993년 고려 태조의 묘실 제1실에서 사용하는 했던 항아리로 최길회가 만들었다는
기록이 항아리 밑바닥에 쓰여있다 이기
그렇게 중요한 제기였건만 이 항아리는 청자라기엔 발색이 누런것이 ㅎㅌㅊ이고
유약의 상태도 후져 고르게 시유되지못했따 ㅠ
그러나 그 당시로서는 "마 이정도면 훌륭하다 이기야" 라는 생각으로 고려 태조의 사당에서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10세기 말 고려청자의 솔직한 상황이였다
하지만 고려사람들은 좆뺑이를 쳐서 100년이 지나 강진의 용운리가마와 고창의 용계리가마에서
우수한 청자를 만드는 데 성공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고려청자의 고향은 고창과 강진이 되었다
12세기로 들어가면서 강진 사당리가마와 부안 유천리가마에서 아름다운
고려청자를 만들어 내어 고려청자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지금 박물관에서 볼수있는 고려청자의 명품들은 모두 12세기때 만들어진것
<청자 참외모양 꽃병>
고려청자의 명품으로는 1146년에 세상을 떠난 인종의 무덤인 경기도 장단의 장릉에서 발견된
<청자 참외모양 꽃병>을 첫손가락에 꼽는데
이 꽃병은 형태뿐만 아니라 유약의 발색과 시유상태도 거의 완벽하다 할수있다
12세기 고려청자에는 명품이 참으로 많고 다양하다 이기 히히
<청자 거북이 모양 주전자>
거북이라는디 사실상 용가리
<청자 향로>
이 처럼 다양한 형태로 청자가 만들어 진것은 음각이나
양각 무늬를 넣는 문양 효과가 신통치 않기 때문에 아예 조각적으로
반전한 것이라고 볼수있다
이것은 조만간 고려사람들이 상감 청자를 발명하게 되는 한 원인이 되기도한다
도자기를 비롯한 모든 양식에는 자연의 생명체와 똑같은 리듬이 있는데
생성이있으면 발전이 있고 발전이 어느 정점에 도달하면 반드시 쇠퇴하게된다 이기야
그리고 쇠퇴에는 그 이유가 있지
중국사람들도 청자를 그렇게 발전 시켜 어느정도 보편화되고난 후에
청자를 버리고 청백자를 만들게 됐던 이유는 다양성을 위해서 였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세계 어떤 도자기든 세가지 사항인데
첫번째는 형태미 두번째는 빛깔이고 세번째는 무늬(문양)이다
문양은 다양성을 제공해 병하나를 만들어도 연꽃무늬, 모란꽃무늬, 구름무늬등 다양한 문양에 의해서
병이 다양하게 된다
하지만 청자는 좀처럼 문양을 받지 않았는데 이는 청자의 표면의 유리질 현상으로 반사가 노무 심하기 때문이다
청자에 문양을 양각이나 음각으로 집어넣으면 지저분하고 안 집어넣으면 다양성이 없어져
고려사람들은 고민에 빠지게되었다
우리나라나 중국이나 청자를 보면 청자에 조각으로 한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다양성을 구하기 위해
조각을 선택했던것이다
하지만 문양이 아닌 형태의 변화에서 다양성을 구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람들은 청백자로 갔던것이다
그러나 고려사람들은 문양의 문제를 적극 해결 하려 노력했다
결국 고려사람들은 청동그릇에 홈을 파고 은실을 집어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청동 은입사
기법도판에서 영감을 얻어 상감청자를 만들게 되는데
이는 나무에 조개껍질을 박아넣고 옻칠을 한 나전칠기의 기법과 같다
<나전칠기 염주함>
흑백 상감무늬는 청자의 바탕색과 아주 잘어울림을 알수있다
이리하여 고려청자는 상감청자로 발전하게 되었고
상감청자는 중국에도 없는 고려청자만이 이룩한 ㅅㅌㅊ는 발명이라고 할수있다 KIA~ 주모!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그렇다면 왜 상감청자가 ㅆㅅㅌㅊ인지 알아보자
그이유가 무엇인고카면 청자태토와 성질이 다른 백토를 넣어서 구웠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백토와 청자태토는 수축률이 다르기 때문에 두가지 흙의 성질을 모두 알지못하면
제대로 된 상감청자를 만들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도 고려의 상감청자를 대단하다 인정할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두가지 흙의 수축률을 만들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지는 말안해도 RG?
각설하고 고려시대 도자기가 모두 청자였던것은 아니였다
검은색을 내는 흑유도 적지않게 보이니
고려시대 도자기는 모두 청자였다고 오해하지말쟈
<흑유 표주박모양 병>
그리고 고려청자에는 산화동을 사용한 붉은 무늬의 동화청자도 있다
고려사람들은 동을 금처럼 아꼈다고 말할 정도로 동화청자의 수는 매우 적은데
이는 청자의 세계에서 특별한 경우에만 산화동을 사용하여 붉은색이 강하게 드러나는것을
기피했다는 뜻이 된다
<청자동채 표주박모양 주전자>
여하튼 이 모든 청자들은 13세기 내내 발전하다 14세기 들어 원나라의 간섭으로
슬슬 운지의길을 걷게되는디....
기형은 무디고 둔중해지며 빛깔은 탁해지고 무늬는 아주 소략해지며 머지않아
양식의 종말을 고할 징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청자 상감 인물무늬 편호>
참으로 요상한 일이아닐수 없다
세월이 지나면서 기술이 계속 발전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운지하다니.. ㅂㄷㅂㄷ
허나 이것은 기술력이 운지한것이 아니라 정신력이 운지한것이라고 볼수있다
좋은 청자, 아름다운 무늬의 상감청자를 만들겠다는 조형적 긴장과
예술적 의지가 약화되고 그저 비슷하게 대충 빨리 많이 만들면 그만이라는 나태함과 해이함이 나타난것이다
여기서 중요한것은 그런 청자들을 세상이 용서하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며
그 사회 자체의 문화가 이미 긴장감을 잃었던 것이였다
이렇게 청자도 사회도 긴장이 풀어진 시점인 1350년 무렵이 될때 왜구들이 크게 쳐들어오게되는데
게릴라처럼 쳐들어와가지고서는 마을들을 쑥대밭으로 만드고 도망가니 국가에서는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해안에서 50리 이내에선 살지 말라고 철수 시켜버린다
이때 해안변에 있던 강진가마와 부안가마도 문을 닫아버리게되었고
이렇게 되니 청자를 만들던 도공들은 전국으로 다 흩어져 버려
고려청자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나의 문화가 망할 때는 이처럼 결정적 충격을 받으면 그대로 쓰러지고 마는 법이다
분청의탄생과종류
고려의 청자가 운지했지만 우리나라의 도자기 문화가 곧바로 종말을 고한것은 아니다 이기야!
그릇은 인간이 살아가는 한 제작할 수밖에 없는 생활필수품이였기 때문이며
전국을 흩어진 도공들은 곳곳에서 다시 청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도공들이 뭐 어디가것노?)
청자는 어디서든 만들수있었다 이유는 청자를 만드는데 필요한것은 태토와유약,가마 세가지였기때문이다
다만 질이나빴다 좋은 흙,좋은 유약도 아니였고 이젠 국가에서 지원해주지않기때문이였다
그래서 이들이 종래의 방식으로 청자라고 구워보면 푸른빛이 나오지 않고
회색이나오거나 누런 색이나와 영~ ㅎㅌㅊ였다
그래서 이들은 상감청자때 쓰던 백토를 도자기 표면에 바르게 된다
쉽게 말해 분청은 상폐년들이 주름을 가리기위해 얼굴에 화장을 떡칠하는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되시겠다
따라서 분청사기는 상감청자가 운지하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자기라고 할수있다
이렇게 탄생한 분청은 그 종류가 다양한데
분청의 종류를 보면 15세기 전반경에 제작된 상감분청과인화분청
15세기 후반경에 제작된 박지분청과선각분청 그리고 철화분청
16세기 전반경에는 귀얄분청과 덤벙분청이 만들어진다
자 그럼 사진을 보면서 서로서로 어떤 차이가있는지 알아보도록하자
먼저 상감분청과인화문분청
<분청 상감 물고기무늬 매병>
상감분청은 상감청자와 같은 방법으로 만들어졌으니 설명은 패쓰
<분청사기 인화문 병>
인화문 분청은 일정한 크기의 도장꽃을 자기 표면에 찍어서 무늬를 만들어내는데
도장꽃은 크기가 종류가 다양하므로 모든 인화문분청이 모두 저런 모양이라고 오해하지는 말자
그 다음으로 박지분청,선각분청 그리고 철화분청을 보자
<분청사기박지모란 당초문편병>
먼저 박지분청은 백토를 자기에 바르고 그위에 문양을 그린후
문양 부분을 긁어내어 무늬를 새기는 분청이다
당초문은 저번에 내가 쓴글을 보면 어디서 왔는지 알수있으니 참고하길 히히
<분청사기 선각 물고기무늬 편병>
선각 분청은
분을 바른 후 그 위에 칼이나 못 등 날카로운것들로 그림을 그린것이다
<분청사기 철화 어조무늬 장군병>
철화분청은 그림을 철로 그린 분청이야
분을 표면에 바르고 그위에 철로 ㅇㅇ
마지막으로 귀얄분청과 덤벙분청은 현재 만들어 내는 분청 중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분청인데
<분청귀얄 대접>
귀얄분청은 앞의 분청들과는 다르게 붓에 휙휙 돌려 분을 바르는 기법이며
동영상 처럼 손물레를 이용하기도 하고 그냥 도자기를 한손에잡고 다른 한손에는 붓을 들고 도자기 안쪽과 겉쪽을
붓으로 휙! 돌리기도 한다
(동영상을 참고하십셔 2분5초)
도자기는 기본적으로 초벌을 한번한후 시유를하고 재벌을하는데(시유란 유약을 도자기에 입히는일)
덤벙분청은 보통 2번의 초벌을 한다
이유는 분을 두껍게 하기 위함도 있고 분을 도자기에 잘 접착시키기 위함이기도 하다
덤벙분청은 닉값을 지대로 하시는데
초벌을 하지않은 도자기를 분에 덤벙덤벙 담갔다가 빼내는 기법이며
덤벙분청은 두가지로 나뉘는데 반 만 담갔다가 빼는 반덤벙
끝까지 담궜다가 빼내는 완전덤벙이있다
<완정덤벙분청>
<반덤벙 분청>
분청사기의 중요한 특징은 관요에서 만든것이아니라 전국으로 흩어진 도공들이 만들어 민요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좀 더 서민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것은 세계공예사상 매우 드문 일이다
역사상 어느 나라든 그나라 공예는 지배층의 산물이였고
따라서 그 시대 기술과 지배층의 취향이 흥건히 배어 있어 화려하기 마련이다
고려도자의 세계도 그러했다
그러나 분청 사기는 각 지방의 도공들이 자기들이 개발한 방식에 의하여 자신들의 정서를 반영하면서 제작했으며
그림 솜씨가 모자라 서툴면 서툰 대로 개의치 않고 그려 넣었다 (고려때 이랬으면 모가지 날아갔을듯)
누가 정갈하게 다듬으라고 지시하거나 간섭하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분청사기 선각 선무늬>
20세기 최고가는 도예가였던 영국인 버나드 리치는
"20세기 현대도예가 나아갈 길을 조선시대 분청이 이미 다했다,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해서 나가야 한다"라고말했다
이렇듯 분청은 상당히 현대적인 감각이 넘치는 도자기이다
그자유분방하고 아무 욕심 없이 만들어낸 분청은 우리나라의 영원한 자랑일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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