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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선택을 잘했다. 지금의 한민족이라는 틀을 만든 신라시대부터 거슬러 가겠다.
1. 신라
우선 한민족을 최초 통합한 신라를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 삼국중에서 가장 약한 나라가 신라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식민생활을 당하기도 했으며, 백제의 공격으로 나라가 없어질 위기까지 수차례 갔다.
제일 약한 신라는 외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다.
우선 신라는 가야와 통합하여 국가의 규모를 키웠으며
때로는 고구려와 손을 잡고, 때로는 백제와 손을 잡으며 국가의 멸망위기를 벗어났다.
신라의 도읍 서라벌에 왜구가 침입해오자 고구려에게 도움을 청하여, 고구려 군사로 왜구를 막아내거나
서라벌에 고구려군을 주둔하여 백제가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고구려의 내정간섭이 심하자, 고구려를 배신하고 백제와 손을 잡아 고구려를 몰아내고, 이후 백제와 동맹을 끊고 백제를 공격한다.
이러한 신라를 보면 비겁하고, 뒤통수를 잘치는 졸렬함이 보이지만 중국의 역사나, 일본의 역사, 유럽의 역사를 보아도 졸렬하기 그지 없는 역사는 수차례 나오기 때문에 국가가 멸망전을 놓고 보면, 마냥 신라의 이러한 전략을 비난만 할 수 없을 것이다.
백제도 신라와 화친과 동맹을 유지하면서도 뒤로는 왜를 시켜 신라의 뒷통수를 공격하기 일 수 였고, 고구려도 신라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신라의 수도에 고구려군이 주둔하며 신라에대한 고구려 지배권을 강화하고, 신라왕을 2차례나 고구려의 입김으로 교체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명백한 신라에대한 주권침해였다.
그 당시 시대는 그러한 시대였다.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 만약 신라가 가만히 있었으면 당시 가장 약한 신라가 멸망하는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고, 신라 지도부 입장에서도 자국이 멸망하게 된다면 대부분 점령국에서 당시 귀족과 왕실은 모조리 없애 반란의 싹을 제거하기 때문에 신라 정부 나름대로의 살아남기 위한 발악이였을 수도 있다.
신라의 동맹파기로 백제는 엄청나게 분노한 상태였고, 백제는 신라침공을 감행한다.
강력한 백제를 막기위해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고구려는 신라에 도움요청을 거절한다.
신라는 바다건너 왜구와도 손을 잡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백제와 왜구의 동맹이 굳건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
왜와 고구려에 도움을 받지 못한 신라는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당과 접촉한다.
결국 당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유연한 외교전략으로 약한 신라는 생존할 수 있었다.
당나라는 그냥 한반도에서 군대는 철군할 생각이 없었다.
당나라 군대는 당시에 매우 강력한 군대였고, 신라만의 자력으로 당군을 몰아내기에는 어려웠다.
이에 신라는 멸망한 백제유민과 고구려 유민을 적극 수용하여 당나라와 항쟁하였고, 결국 당나라를 물리치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완성한다.
지금의 기준으로 땅떵어리가 짤려져나간 통합국가일지라도, 당시 기준으로는 죽냐 사냐의 문제였으며, 한민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을 감안해야한다. 하지만 위에는 발해라는 강력한 나라가 곧 탄생하여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니 이 또한 나쁜 것은 아니다.
2. 고려의 등장
통일신라는 결국 멸망하게 된다. 국가가 유지되어 1000년 역사를 넘어 장수하였으면 하는 여러사람들의 바램이 있겠지만, 신라의 낡은 체제에 대한 갈등과 분열, 국가 경영실패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결국 다시 후 고구려, 후 백제로 나뉘어 3국이 되어 다시 전쟁에 돌입한다.
여기서 망해가는 신라이지만 신라의 마지막 외교력이 발군한다.
1. 후백제와 후고구려에 대항하여 다시한번 삼국통일을 이룰것인가.
2. 아니면 이 중에 가장 유력한 국가에 붙어서 국가는 멸망할 지언정, 불필요한 소모전을 줄일 것인가.
신라 정부는 2번을 선택했고 후 백제와, 후 고구려 둘 중에 왕건의 후고구려를 선택한다.
또한 신라는 당시 빠른 판단으로 자신의 가장 가치가 높을 때 나라를 후 고구려에 받침으로써, 신라 왕족과 귀족은 모두 고려의 왕실과 정부에 편입되었으며, 백성들이 전쟁의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았다.
신라 내부에서도 다시한번 국가를 재정비하여 지방 토호세력들과 외교를 통해 항전하면 나라를 되돌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으나, 신라의 마지막 왕이되는 경순왕이 이것을 막고 고려와 통합하게 된다.
나라는 없어졌지만, 가장 중요한 백성의 목숨과 자신의 일족과 지도부의 생존 그리고 자신의 영토가 전쟁에서 초토화 됨을 막은것이니 다른 면으로 보면 수많은 목숨과 재산을 살린 성군이라고 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신라 왕실과 지도부는 그대로 고려에 편입하여 후 백제의 지도부와는 다르게 대접받고, 번영을 이루게 되며 신라 왕족의 경주 김씨 세력은 조선까지 이어져서 번영한다.
3. 고려의 선택
당시 초강대국인 몽골을 꺾을 수 있는 국가는 없었다.
당시 몽골은 세계를 제패할 만한 힘을 가진 강대국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주종관계를 맺으면 맺었지 부자 관계나 형제 관계를 맺은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몽골은 고려와 형제 관계를 맺었고 이것은 대단히 이례적이었다.
"고려의 태자가 스스로 와서 나에게 귀부하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 고려사
고려왕 원종이 쿠발라이를 선택한 순간 둘다 팔자가 피게 된다
당시 쿠빌라이는 다른 왕자와 왕위계승 경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태자였던 원종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원종이 쿠빌라이 가오 살려주며 원의 황제가 된다.
당시 쿠빌라이는 원종을 크게 반기며 기뻐한다. 훗날 원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는 쿠빌라이와의 역사적인 만남이었다.
- 자세한 이야기 -
1258년 무신정권의 수장 최의가 죽자 고려는 몽골과의 강화를 결정한다
고려의 태자 원종이 항복하러 몽케칸을 만나러 갔는데 몽케칸이 갑자기 죽게된다.
거대한 몽골제국의 수장이 죽자 화북에 있던 쿠빌라이와 카라코룸을 지키던 아릭부케 사이에 칸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불쌍한 태자는 한 나라의 운명을 걸고 간을 봐야하는 입장이되버린다
당시 대부분의 몽골귀족들은 아릭부케를 지지하는 가운데 태자는 쿠빌라이를 선택한다
당시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가 자신에게 줄을 댄것을 좋아했다고 알려진다.
"고려는 만 리나 떨어진 먼 나라이고, 당 태종이 정벌에 친히 나섰지만 능히 고려(고구려)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지금 그 세자가 스스로 와서 우리에게 귀의하니, 이는 하늘에 뜻이다"
쿠빌라이는 태자를 크게 환대하고 강화를 논의했는데 때마침 원종의 아버지 고종이 사망해 고려왕도 비어버렸다
쿠빌라이는 원종을 책봉해 고려로 보냈다.
또한 슨상님 북한에 쌀퍼주듯 약속을 해준다. 이약속을 세조구제 혹은 불개토풍이라고 하는데 고려의 독립성과 자치권을 보장받게 된것이다.
1.의관은 고려의 풍속에 따르고, 모두 바꿀 필요가 없다.
2. 개경으로 환도하는 일은 국력을 회복한 다음 실행해도 좋다
3. 고려에 주둔하고 있는 몽골군은 가을까지 철수한다
4.다루가치는 철수시킨다.
이 약속은 엄청난 영향을 미쳐 훗날 원이 고려에 성을 설치하고자 할때 고려는 "옛날 세조(쿠빌라이)께서 약속을 했는데 형님께서 그걸 깨뜨리면 모양이 좀 거시기하지 않겄소?" 라고 원에 상소를 올려 성설치계획이 무마된다
당대에 고려 지도부의 결단과 정치감각은 매우 뛰어났으며 고려는 몽골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1.고려태자 원종
2. 적중률
3.ㅆㅅㅌㅊ
4. 조선의 등장
조선은 알다싶이 성을 갈아치우고 국가를 찬탈한 역성혁명이자 피의 쿠데타로 건설된 나라이다.
고려 지도부에서는 이성계를 수장으로 하여 요동을 정벌하라고 명령하지만 이성계는 이 계획은 안될 것이라고 단정하며, 왕의 군사를 되돌려 주군인 자신의 왕에게로 진격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상관이자 스승인 최영장군을 살해하고, 수 많은 아군을 살상한다. 얼마 가지 않아 왕권을 차지하며, 고려의 왕이 될만한 왕씨들을 모조리 살해한다. 이것을 왕씨몰살사건이라고 한다. 개성은 왕씨들의 피로 피바다가 되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지금의 성균관은 고려 말 신돈에 의해 건설되었고, 많은 지식인 유학자들이 나오게된다. 그 유학자들이 고려 조정을 무너뜨리는데 일조하니, 역사는 아이러니 하다.
그리고 요동정벌이 불가능하다는 이성계의 판단이 틀리다. 맞다를 단정 할 수 없지만, 고려 정부에서 중앙군으로 집결을 요구하자 5만명의 대군이 집결하였다. 당시 고려 시스템이 막장이 아니였다는 점이다.
"좌우군 3만8,830명, 수송대 1만1,634명, 말 2만1,682필을 동원하였다."
명장이였던 이성계는 요동정벌이 객기라고 하였지만, 당대에서 손꼽히는 명장인 최영장군은 가능하다고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고려의 조정과 왕실에서도 가능하다고 결단을 내린 상황에, 이성계 스스로 독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사안은 분명히 아니다.
군인은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집단이라는 점, 그리고 국가를 뒤엎어 자신이 왕권을 찬탈한점, 수많은 자국민을 학살한것에 대해 옹호할 수는 없다.
다만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지금의 중국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갖추고 스스로 신하국이 되었다는 점은 나중에 크게 작용한다.
임진왜란 당시 한국은 수도 한양까지 털리고, 지금의 북한 지역 대부분이 일본군의 차지가 된다.
이 판을 뒤 엎을 수 있었던것은 명나라의 참전이 였다. 조선이 그 동안 명나라에 신하국을 자처하면서 조아린 덕분에 당시 전쟁에서 버틸 수 있었다.
물론 이순신이라는 명장이 바다에서 버티고 있었지만, 명수군과 명 육군이 없었으면 진작에 망해도 망할 나라였다. 초창기 명나라에서 조선에 대해 물자지원과 원조를 해주었다는 점도 진실이다.
어쨋든 명의 도움으로 조선의 왕실은 겨우 목숨은 부지하였다. 그 과정에서 국토와 조선의 백성은 초토화 되었다. 장기간 평화에 조선의 군대가 나약해지고, 전쟁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당한 뼈아픈 경험이였다.
조선의 암흑기는 계속된다.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기위해 청나라와 항전을 결심하고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그 결과 다시한번 백성은 학살당하고 국토는 초토화된다.
청나라는 조선과의 병자호란 전쟁에서 승리를 함으로써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고, 명나라를 멸망시켜버린다.
명을 없애는데 오히려 일조한 조선의 나비효과였으며, 정치감각이 없는 조선지도부의 엄청난 실책이였다.
나라 설립부터 명나라에 휘둘리더니, 이후에는 청나라에 휘둘리고 뭐하나 재대로 굴러가는게 없던 조선은 결국 역사가 흘러 나라를 다른나라에 팔게된다.
러시아, 청나라, 일본제국 3국 중에서 식민지로 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나약했다.
이 나라들과 재대로된 전쟁도 하지 못할 수준으로 약할때로 약했으며, 여기 저기 다른나라에 붙어가며 겨우 지도부의 정치생명만 연장하고 있는 꼴이였다.
결론적으로 조선의 마지막 외교력은 나쁘지 않았다.
일본에 복속되는 것으로 이것을 해결하면서 전쟁도 하지 않고, 일본제국에 편입되었으며 고종은 일본제국의 황실로 편입되어 매달 연금을 받았고, 고종의 아들은 일본군 육사로 입학하여 일본 장교로 생활하다 나름 태평양전쟁 도중 안전한 후방지역이였던 일본 히로시마에서 배치받아 잘 지내던 중 깜짝 원자폭탄을 맞아 사망한다.
이외에 조선의 관료와 귀족 계급들은 그대로 일본제국의 관료로 한반도에서 공무원으로 곧 잘 근무하고, 일제에 도움을 주며 자신들의 권력을 지켜 나갔다. 이것지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친일파 논란이 거센 이유이다.
백성입장에서는 나라 팔아먹고 잘사는 지도부가 얇밉고, 지금 대한민국이 건국되어도 일제의 앞잡이들이 건물주가 되거나, 조선에 남아있던 일본회사를 인수하여 지금의 대기업을 만들고, 자식을 명문대에 진학하여 다시 상류층으로 편입되어 잘나가는것을 보니 한국의 일반 하층민들은 배아프고 기분나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신분제도는 사실 어쩌면 현대 한국에도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5. 대한민국의 등장
미국의 초토화 공격으로 인해 일본제국은 완전항복을 선언하면서 조선은 식민지에서 다시 독립국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다.
사실 표현하자면 대한민국은 스스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독립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의 힘으로 조선은 해방되게 되고, 잠깐 미군이 들어와서 조선을 지배하게 된다.
여기서 어찌 보면 조선도 당시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같이 일본과 동조하여 태평양전쟁에 참여하였으니, 전범국가로 몰릴 수 있었으나, 초창기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사람들의 열정적인 변론으로 우리는 식민지배를 당해 어쩔 수 없어서 참전했을 뿐이라는 말로 "전범국"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직업이라는게 마땅치 않아 일본군으로 자원입대한 조선인들도 엄청나게 많으며, 스스로 돈을 벌기위해 일본에 부역한 부역자들도 매우 많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우리의 민낯이다.
일본이 갑자기 빠져나간 한반도에는 일본인들이 남긴 수 많은 재산이 있었다. 특히 공장 같은 경우 설비를 일본으로 들고갈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남겨둔 경우가 많았고, 미군정 시대를 지나 6.25전쟁 이후 이 일본이 남긴 기업을 대한민국 정부 추진하에 나누어 주게 된다.
이때 나누어 받은 각종 재산들이 지금의 대기업이나 알짜 기업들의 출발인 경우가 많다. 즉 일본제국이 한반도를 철수하면서 남겨둔 각종 생산시설을 정부로부터 불하 받으면서 시작한 경우가 많다. 이것을 "적산불하"라고 하며 현재 대한민국의 대부분 재벌이 이 적산불하로 출발 했다. 자세한것은 구글에 "적산 불하 기업"을 검색해보자
우여곡절 끝에 자주성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이 세계속에 출발하지만, 위에는 북한 아래는 남한으로 반쪽짜리 독립을 하게되고,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서울이 함락당하고 남한이 소멸할 위기 까지 몰리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외교력으로 미국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UN군의 참전결정이 나면서 평양에 태극기를 꼿고 전세 역전을 하기도 했다.
전쟁속에 미국에 막대한 원조를 받았으며, 이후에도 미국에 요구에 의한 베트남전 참전을 댓가로 그 어떤 국가보다도 많은 달러를 수혈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결정적으로 지금의 초강대국인 미국을 우방국으로 선택하면서, 지금의 경제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사실상 미국에 의해서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되고, 북한과 중국의 공격에도 미국에 의해서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고 지금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미국에 원조로 국민들의 초창기 가난에서 벗어났으며, 미국의 달러지원으로 국가 산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사실상 미국이 낳은 자식.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역사를 보면 선택이 중요하다. 5000만 국민이 있는 만큼 5000만가지의 다른 생각이 존재한다.
당연히 여러 사람들이 선택에 대한 판단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살아남았고, 우리 지도부들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쪽에 붙으면서 자신들의 생명과 기득권을 유지하였다.
지속적으로 시대가 바뀌어도 권력자 가문들이 살아남으면서 이것을 어찌 보면 한국의 하층민은 결코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없는 한국사회를 만들었으며,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들이 제거된 한국이기에 일반인들은 꿈이 없어 지고 있다.
결국 하층민이 상류층에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인 노예가 노예를 만들지 않는, 자식을 낳지 않음으로써 복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의 대를 끊어서, 이 사회의 구조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다.
OECD에서도 자살은 최대로 달리고, 노인빈곤율도 OECD 1위이지만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낮으니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명품을 구매하는 허영적인 명품소비 태도로 명품소비형태의 국가 1위를 달성하였다.
대한민국이 멸망한다면 북한때문도 중국때문도 아니고, 이제는 우리 자신 때문이다.
좌파니 우파니 서로 물고 싸워도 연봉 1억 5000만원 이상의 저질 지도부일 뿐이고, 둘 다 개쓰레기 집단임은 틀림없다.
무능한 지도부의 국가 경영에 대한 실패에 대한 결과가 바로 지금의 엄청난 자살율과 저출산, 백수양산, 세금증가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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