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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가 고조선을 기점으로 5000년의 반만년 문명의 역사는 아닌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5000년 역사의 반토막인 대략 240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선 요약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요임금 즉위 50년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편찬한 일연은 요임금은 무진년에 즉위하였으므로 즉위 50년은 정사년이 되므로 정확한 시기가 의심스럽다는 주석을 함께 실었다.  즉 고조선이 기원전 2333년이라는 건국 연도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의한 것으로 당시 기록을 하던  일연 스스로가 주석에 이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한국 국사편찬위원회는 삼국유사를 근거로 단군 조선의 설립을 기원전 2333년으로 보고 있고현행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들 역시 이를 바탕으로 기원전 2333년을 단군 조선의 건국 시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청동기 시대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부터 시점을 잡아도 기원전 2000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역사서의 건국 시점에 대한 서술이 실재와 부합하는 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의 기록으로 알려진 《관자》(管子)에 제나라와 교역한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사서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허나 현대에는 《관자》가 기원전 4세기경에 직하학궁의 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며, 이에 따라 고조선이 중원에 알려진 시기는 기원전 7세기가 아닌 최소한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 좁혀진다. 

 

 

 

고조선의 등장과 중국에서 등장하는 고조선의 최초의 기록

 

한국에는 고조선의 건국을 기록한 사서가 여러개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다. 동국통감은 조선 초에 쓰여진 역사책으로 여기에도 고조선의 건국 기록이 있지만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를 보고 쓴거라 엄청난 가치가 있진 않다.

 

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기원전 2333)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 삼국유사

 

분명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고 최초의 임금이 되었다고 나와있다. 그러나 일연 본인도 말했다시피 건국년도를 의심했고, 실제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였던 요령지방은 기원전 10세기나 되야 본격적인 청동기시대로 진입한다. 

 

 

1. 기원전 9~7세기에는 요령 지방에 고조선의 모체가 되는 여러 작은 부족국가가 서서히 등장한다.

기원전 9~7세기 요령지방은 각 지역마다 큰 차이가 있는 청동기 문화가 존재하였다. 우리가 아는 고인돌은 주로 강상유역에서 나타나고, 미송리토기는 요동북부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다. 그래서 교과서에 나오는 고인돌과 미송리토기를 바탕으로 한 넓은 고조선 지도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학계에서는 폐기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2. 중국에서 최초로 고조선이 등장하는 기록이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자.

 

 발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주십시오.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관자

 

알사람은 다 안다는 관자는 기원전 7세기 경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책이다. 

 

 

3. 기원전 4세기 중반 요동지역을 석권한 고조선, 이 시기부터 전설이 아닌 역사로써의 고조선의 시작이다.

 

기원전 6~4세기에 걸쳐 요동지방을 통일하고 평안도까지 아우르는 느슨한 연맹체로 성장하게 되는데, 마침 절묘하게도 이 시기에 고조선이 본격적으로 중국문헌에 등장한다! 아래의 기록을 살펴보자.

 

연나라 문후(기원전 361~333)에게 말하기를, "연의 동쪽에는 조선 · 요동이 있고, 북쪽으로는 임호 · 누번이 있고,... - 전국책

 

보시다시피 정가와자 유형이 요동을 통일하는 시기와 비슷한데, 정가와자 유형이 고조선임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이미 연나라 동쪽의 유력한 세력으로 떠오른 조선은 급기야 스스로 주나라 천자의 칭호인 왕을 칭한 뒤 연나라를 먼저 공격하려한다. 비록 이는 조선의 대부 예의 간언으로 중지된다. 

 

고조선이 왕을 칭하고 연나라를 공격하려 한 사건은 기원전 323년 경인데 이 시기 고조선은 관료제도도 존재하였고, 연나라를 먼저 공격할 정도로 강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처럼 고조선은 연나라 동쪽의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연나라는 이를 방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나라는 조선을 공격하여 정벌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연나라 소왕은 장군 진개를 동쪽으로 파견하여 조선과 근방 이민족인 동호를 정벌하여 2천여리의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300년경 또는 3세기 초반의 일이다)

 

연나라의 공격에 조선은 허망하게 패배하여 요동 전체를 상실하고 청천강 이남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이렇게 털릴거면서 어떻게 선제 공격을 할려했을까) 그리하여 수십년간 조선은 평양일대에 찌그러져 잠적하게 되는데...

 

 

4. 요동을 상실하고 평양으로 도망간 고조선 세력은 세형동검 문화를 바탕으로 재정비를 착수하게 된다.

기원전 3세기 초 연나라에 대패하고 요동을 상실한 고조선은 수십년간 중국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데, 평양지방에서 재정비를 착수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고조선이 평양일대에서 재정비를 하던 중 중국에서는 몇차례 대혼란기가 찾아왔는데, 바로 전국통일과 진한교체기였다!  진시황이 전국통일(기원전 221)을 하고 진나라와 고조선은 청천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보게 되었는데, 이 때 고조선의 왕은 부왕이라는 사람이었다.

부왕은 이때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형식적으로 진나라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조선의 안정을 확보하였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진이 천하를 병합한 후에, 몽염을 보내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렀다. 이때 조선왕 부가 즉위했는데 진의 공습을 두려워하여 복속하였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 위략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제. 고조선은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준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준왕도 조선을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준왕의 대표적 정책이 바로 중국 유이민을 대거 받아들이는 것이었는데, 이때 중국은 진한교체기의 혼란기 때문에 수많은 중국 유이민이 발생하였다. 준왕은 이들을 받아들여 인구를 늘리고 선진문물을 흡수하여 조선을 점차 강력한 국가로 발전시켜나갔다. 

준왕 때 강성해진 고조선은 한나라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여(기원전 202년) 서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 때 한나라는 군현제를 폐지하고 지방분권적인 군국제를 실시하였는데, 이 틈을 타 준왕은 청천강을 넘어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조선과 한나라는 패수(압록강)을 경계로 하였다. 이정도면 연나라에 요동을 털린 뒤 상당히 국력을 회복했다고 할 수 있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한 대에 이르러 노관이 연왕이 되자, 조선과 연은 패수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 위략

 

먼 곳을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동의 옛 요새를 다시 고쳐 패수에 이르러 경계를 짓고, (조선을) 연에 속하게 했다. - 사기

 

 

5. 기원전 2세기 위만 집권 이후 영토를 크게 확장한 고조선, 북한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준왕은 중국 유이민을 흡수하면서 중흥에 성공하였으나 그가 한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짱깨였던 위만에게 지나치게 과분한 영토와 권력을 하사한 것. 

위만은 옛 연나라 지역에 살던 사람으로 기원전 195년 오랑캐 복장을 하고선 패수를 건너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위만은 준왕에게 신하가 되겠다고 자청하였고, 이에 위만을 신임한 준왕은 그에게 서쪽 100리의 영토를 맡기고 박사라는 관직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은혜도 모르는 위만은 점차 자신만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세력을 확보한 위만은 한나라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고 준왕에게 거짓말을 한 뒤 준왕의 통수를 치고 왕험성을 공격하여 준왕을 쫓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준왕은 바다 건너 남쪽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조선의 새로운 왕이 된 위만은 한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맺었는데, 위만이 한나라의 신하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이 외교적 안정을 얻음과 동시에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을 더욱 강력하게 해줄 수 있었다. 아래의 기록을 참고하자.

 

요동태수가 곧 (위)만과 외신의 약조를 맺어 요새 밖의 오랑캐를 지켜 국경을 도둑질하지 않게 하고, 여러 오랑캐의 군장들이 천자를 보고자 하면 막지 않도록 하였다. 천자도 듣고 허락하였다. - 사기

 

곧이어 위만은 강력해진 힘을 바탕으로 주변 소국들을 정벌하여 대부분 집어삼키게 된다. 진번 임둔과 같은 소국들을 정복하고 그 영토가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 때가 고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약조를 통해 만이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고 그 방면의 소읍을 침략해 항복시켜, 진번 · 임둔이 모두 복속하여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사기

 

예 및 옥저 고구려는 본디 모두가 조선의 지역이다. - 후한서

 

 

6. 고조선의 멸망

 

위만이 죽고 아들을 거쳐 손자 우거왕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거왕은 할아버지와는 달리 한나라에 매우 강경한 정책을 취하였는데, 이는 조선 내부 여러 신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상 역계경은 우거왕이 자신의 간언을 듣지 않자 요동군으로 망명하였고, 예군 남려는 우거왕을 떠나 진국으로 내려갔다. 한술 더떠 우거왕은 흉노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한나라의 강한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다. 아래의 기록을 보자.

 

우거왕에 이르러서는 한의 유망민을 끌어들인 것이 많았고, 입조하지 않았으며, 진번 방향의 여러 나라가 상서를 올려 천자를 뵈려고 해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 사기

 

우거왕의 강경책으로 여러 세력이 떨어져 나가는 상황에서 급기야 전쟁을 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한나라는 동쪽 변방까지 직접 개입할 여유가 없어 사신 섭하를 파견하여 회유하도록 하였는데, 우거왕이 끝까지 한나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섭하는 패수에 이르러 조선의 비왕 장을 찔러 죽이고 조선의 장수를 죽였다고 보고했는데, 이에 제대로 열받은 조선은 군사를 일으켜 섭하를 기습해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고조선을 멸망시킨 한나라의 황제, 한 무제 그래도 그 덕분에 고조선 기록이 그나마 남아있으니 아이러니히다.

 

결국 유혈사태까지 일어나서 한나라는 조선과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황제였던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에게 5만의 육군을, 누선장군 양복에게 7천의 수군을 주어 왕험성을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우거왕이 생각은 병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순체의 육군은 패수에서 조선군에 패하였고, 양복의 수군도 우거왕의 공격으로 참패하여 양복은 10여일간 군사를 잃고 헤매다 겨우 병사를 정비하였다. 초기에는 고조선이 전쟁의 우위를 점하였으나 전쟁이 점차 장기화되자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었던 한나라와 고조선은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태자가 1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패수를 건너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나라는 교섭을 하기 위함이니 무장을 해체할 것을 요구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한나라를 의심하여 무장을 풀지 않았고, 결국 교섭은 진행되지 못하고 다시 전쟁이 시작된다. 

 

교섭이 실패하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상황은 점점 조선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패수(압록강)을 넘지 못하던 한나라의 육군은 고조선군을 격파하고 패수를 넘어 왕험성 북쪽을 공격하게 되었다. 

 

허나 수군은 계속 조선의 병사에게 패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나라 육군과 수군사이에 대립이 발생한다. 조선에 선전하던 육군은 계속 전쟁을 하길 원했고, 계속 조선에 패배하던 수군은 화친하길 원했다. 그래서 육군과 수군사이에 입장 차이로 대립이 발생했는데 수군 대장 양복이 조선과 내통한다는 모함으로 체포되어 결국 수군은 육군 대장 순체의 지휘 아래 들어가 대립이 해소되었다. 

 

그리하여 통합된 한나라 군사는 맹렬히 왕험성을 공격하였고, 결국 극단적인 상황에 까지 몰린 조선 내부에서는 주화파와 강경파로 나뉘게 된다. 이 때 주화파였던 조선상 노인, 니계상 삼, 장군 왕겹, 상 한음이 모의하여 한나라에 투항하고 자객을 보내어 우거왕을 암살하였다. (어찌 수백년 뒤 고구려의 멸망과 비슷하다.)

 

그러나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는데, 우거왕의 대신이었던 성기가 끝까지 투항하여 왕험성이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기도 결국 암살당해 한나라에 대응하는 세력은 사라졌고, 결국 왕험성이 함락됨으로써 고조선이 멸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108년)

 

삼이 사람을 시켜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항복하여 왔으나, 왕험성은 함락되지 않았따. 죽은 우거의 대신 성기가 또 대응하여 다시 군사들을 공격하였다. 좌장군은 우거의 아들 장항과 상 노인의 아들 최로 하여금 그 백성을 달래고 성기를 죽이도록 하였다. 이로써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설치하였다. - 사기

 

동쪽으로 조선을 정벌하고 현도와 낙랑을 세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 사기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멸망 이후 한사군 설치

고조선은 멸망하였고 멸망한 조선의 땅에는 4개의 한군현이 설치되었다. 

그렇게 고조선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즉 한반도가 5000년 역사라는 것은 허구에 가깝고 신화를 그대로 자신들의 전설로 편입하여 사실인것 마냥 떠벌리고 다니고, 자신들의 역사시기를 설정하는 것은 거짓되고 신의가 없는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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