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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화승총과 유럽 머스킷

 

유럽 머스킷과 아시아 화승총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틀린 거다.

아시아 화승총은 명/ 조선에서는 조총, 일본에서는 철포등이라 불렸는데

흔히 화승총이라들 말하는게 네덜란드에서 15세기 개발된 아퀘부스야. 유럽 머스킷은 그 개량판이고.

 

 

  

윗쪽이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머스킷, 아래가 아시아 화승총의 원형이 되는 아퀘부스

 

덩치차이ㅍㅌㅊ? 머스킷의 총신이 훨씬 길고, 화약도 더많이 들어가며 탄환크기도 2배다.

관통/파괴력이 애초에 비교대상이 아님.

 

 

 

 

 

 -명나라

 

 

삼단사격전술은 오다 노부나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명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화승총을 제식화한 나라였다.

1513년, 신장위구르쪽인 투르판을 침공했을 때 접한 무슬림 상인들을 통해 투르크식 화승총이 도입됬고

1517년에는 광둥성 마카오 방면에서 포르투칼 선박들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식 화승총이 전래됬어.

 

 

명나라가 도입한 2가지 화승총. a는 투르크식이고 b가 유럽식.

 

명나라 대장장이들은 이 총들을 분해해서 모방, 국산화하는데 성공했어.  

1550년대부터 절강성에서만 년간 화승총 1만정이 생산되서 명군에 보급됬지.

1550년 스페인의 총기 보유량이 4만 5천정이었고 프랑스가 4만정, 포르투칼이 2만정

1588년 영국이 3만 3천정.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일본 전역의 총기 보유량이 3만정이니까

역시 숫자로만 따지면 대륙의 기상이盧...

 

나도 사실 아무것도 몰랐을 때 왜 조선이 명나라 따위를 섬겼냐했어.

그런데 공부하면서 명의 병력/ 년간 병기, 탄환, 화약생산량보니까 이건 뭐 조공안하고 뻐팅겼으면 안남국꼴 났을 듯.  

 

 

 

 

-일본

 

일본이 1543년 처음 접한 포르투칼산 화승총

(사실 일본이 도입한 화승총은 유럽에서 쓰이던 게 아니라 말라카, 싱가폴등지에서 현지화된 동남아 버전에 가깝다.)

 

한편 화승총도입의 대명사처럼 말들 하는 일본은 1543년에나 가서야 표류한 포르투칼 화물선을 통해 접할 수 있었어.

타네가시마 영주였던 토키타카는 포르투칼인들에게 화승총 2자루를 구입해서 스기보노라는 대장장이에게 모방해서 복제하라고 했지.

 

 

 

일본이 카피한 화승총, 당시 일본 기술로는 격발에 중요한  방아쇠-스프링부품은 도저히 만들 수가 없어서 지렛대방식으로 바꿨다.

 

일단 비슷한 대로 때려맞춰서 만들기는 했는데 당시 일본의 야금술, 주철기술이 워낙 ㅎㅌㅊ라

완성도가 원조에 비해 떨어졌어. 그래도 일단 얼추 총모양새는 만들어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총열만은 어떻게 자체제작할 수가 없었다.

 

 

 

야금, 주철기술이 ㅆㅎㅌㅊ라...유럽산 원조와 달리 총열이 똭! 각이 져있다.

 

윗사진처럼 철판을 이어붙이는 시도도 해봤는데 총알이 나가기는 커녕 총자체가 폭발하는 게 다반사.

결국 스기보노는 포르투칼인에게 자신의 딸을 바치고 겨우 총열제조기술을 얻을 수 있었어. 

(사스가 갓본의 아버지 클라쓰)

이렇게 완성된 철포는 시마즈가문에 헌상되었다.

이후 1549년, 시마즈 다키히사가 카지키성을 공략하는 것을 계기로 철포는 일본 전역으로 퍼졌지. 

 

 

 

 

 

-조선

 

으따 히데요시가 조선침략 준비하고 있으니 우덜 무역 방해안받게 대비좀 하시랑께요? 

 

제일 마지막으로 화승총을 도입한 나라는 조선이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0년, 쓰시마도주에게 전쟁발발경고와 함께 화승총 3정을 헌상받았다.

정작 선조는 활보다 연사력/사거리가 떨어진다 평하고 군기시 창고에다 쳐박아둔뒤 별 신경을 쓰지않았어.

이게 2년 뒤 대참사로 이어지고....

 

 

 

18일 한양레이스 

 

믿었던 신립이 지휘하는 8천의 정예 북방기병이 전멸하고 왜군은 한달도 안되서 한양까지 주파

사실 조선이 아예 일본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정도로 무너질 줄은 스스로도 몰랐을 거야.

조선은 1592년 터진 임진왜란을 계기로 왜인들이 들고 온 화승총에 엄청난 쇼크를 먹었다.

 

 

 

뒤늦게라도 깨달아서 다행.

 

명군이 참전하기 전까지 5만 근왕군이 와키자카의 1600명에게 박살나는 등 조선은 대공황상태였어.

조총을 우습게봤던 선조조차 문화컬쳐를 먹었던지 하루빨리 총을 만들어내라 닥달했지.

 

 

 

1592년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였다가 귀순한 사야가, 조선에 조총 제조법을 전수했다.

-사실 사야가는 본명이 아님, 조선침공 이후 행방이 묘연한 하라타 노부타네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투항한 왜인들, 항왜들을 갈아넣은 끝에 조선은 조총을 국산화시키는데 성공했고 제식화했어. 

물론 임란이전에도 개인화기로 승자총통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명중률이라거나 일제사격을 통한 화망구성같은 면을 본다면 조총에 상대가 못되지.

 

 

 

  

17세기 초부터 유럽에서 보편화 된 부싯돌 격발 방식, 플린트락이라고도 함.

오늘날의 라이터와 유사한 원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1600년이 지나면서 유럽국가들은 화승식을 버리고 부싯돌 격발이라는 신기술을 도입하기 시작했어. 

반대로 명/청에서 수석총을 쓰는 모습이 일부 보이기는 했지만 동아시아는 화승식을 고수했다.

여기에 대해 여러가지 썰이 있지만 동아시아의 기후에 부싯돌격발방식이 맞지않았던 게 큰 요인인 거 같아.

일단 양산하기에 화승식이 가격이 더 저렴했고.

 

하여튼간 인생에 3번의 기회가 온다던가.

조선도 이런 추세에 뒤쳐지지않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는 했다.

 

 

 

 

치즈를 김치에 싸서 드셔보세요.

 

1656년, 효종 때 훈련도감에서 박연(벨테브레)이 부싯돌 격발식 소총을 제작해서 진상한 일이 있었어.

일단 불발율이 20%나 되는 화승식보다 효율이 좋았으나 체택되지 못하고 사장됬지.

왜 그랬을까?

부싯돌총 1개가 화승총 3개 값과 같았고 무엇보다 당시 조선 기술로 생산하기에 부품이 너무 복잡했어.

결국 수지가 맞지않는다는 이유로 조선군의 대세가 되지는 못했다.

 

 

 

 

결론/

1. 16세기 초 아시아에도 유럽식 개인화기가 도입되기 시작함.

2. 명-일-조선 순으로 제식화.

3. 조선도 유럽처럼 수석총쓸 수도 있었는데 비싸고 부품도 복잡해서 제식화못함.

 

본래는 라지푸트 용병대, 예니체리, 절강보병, 사이가 철포대등 아시아쪽 화약보병 정보글 써볼까 했는데

일단 먼저 아시아의 화기도입에 대해서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써봤어.

 

자료인용 KBS

 

원글 펌

url.kr/bZof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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