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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알아볼 작가는

 

 

 

수수께끼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

 

이분이야

 

 

 

  • 출생-사망

    1862.7.14 ~ 1918.2.6

  • 국적

    오스트리아

  • 활동분야

    회화

  • 출생지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

  • 주요작품

    《유디트 Judith》(1901),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Portrait of Adele Bloch-Bauer》(1907), 《입맞춤 The Kiss

 

 

 

이렇다네

 

 

 

 

 

간지남..

 

 

이 클림트 아저씨가 왜 수수께끼 화가라고 불리게 됬는지 부터 설명할게

 

 

 

 

이 아저씨는 1862년 7월 14일에 태어나서

 

1918년 2월 6일에 사망하셨어

 

근데 이 아저씨가 살아있는 생애 동안에

 

본인의 그림에 대한 일체의 설명도 없었고,

 

인터뷰조차 한번도 하지않았어.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하게 숨긴거지

 

그래서 작품의 의미도 알수도없고, 물어볼수도 없는 그런 수수께끼가 된것이지.

 

 

 

 

<The Kiss>

1907년작

클림트의 작품중에 가장 유명한작품이야.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태어났어.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귀금속 세공사이며 판화가였지만, 그리 성공하지는 못하여서 클림트의 어린시절은 가난하고 우울했지.

(여기서 아버지가 귀금속을 세공하는모습을 보고 나중에 클림트가 금을이용하여 모자이크작업을 펼칠때 크게 영향을끼쳤음에 분명해)

 

14세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게되.

 

그리고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마치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 그리는일을 했어.

 

그는 1880년대 말에 빈에 새로 들어선 국립 극장과 미술사 박물관에 장식화를 그려 건축 장식 미술의 대가로 자리를 굳혔지.

 

 

<Farm Garden With Sunflowers>

1912년작

 

 

 

 

근데 하나 짚고 넘어가자면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서 자세한것을 알기는 힘들어,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적도 없고, 인터뷰한적도 없다고 아까 말했었지 ? 그래서 자세한것을 알수는없어

 

 

 

 

<Musique>

1895년작

색이 참 좋지않아 ?

 

 

 

 

 

 

 

 

클림트는 1892년 아버지와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어.

 

그러면서 인상파와 상징주의 등 다양한 아방가르드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

 

그는 순수 응용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어.

 

1897년 당시 보수적인 미술 단체의 일원이었던 클림트는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인간의 내면에 접근'

 

하고자 하는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어.

(빈 분리파에서 빈은 비었다는게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빈이야.

 

이미 '모나코 분리파', '베를린 분리파'가 세워지고 난 후지.

 

그리고 통합이 아닌 분리를 이념으로 세울수있는것은 예술이기 때문인것같아.)

 

 

 

이 '빈 분리파' 에는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가, 칼 몰, 오토 바그너 등 당대 오스트리아를 선도한 화가, 디자이너, 건축가 등이 있었어

 

<Lady With D Fan>

 

 

<Mrs. Edele>

 

 

 

 

 

클림트의 작품은 관능적인 여성의 이미지와 찬란한 황금빛, 화려한 색채를 특징으로해.

 

그는 성(性)과 사랑, 죽음에 대한 풍성하고도 수수께끼같은 알레고리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해.

 

1900년대 부터 1903년까지 빈 대학교 대강당의 천장에 차례로 그린 우의적인 장식화

 

<의학><철학><법학>은 그 외설성으로 인해

 

빈 대학교 교수들과 정면충돌까지 했지.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더이상 공공작품 의뢰를 안받았고, 기하학적이고 지적인 추상 양식으로 변모해갔어

 

<의학> <철학> <법학>

이 것중에 유일하게 <의학>만이 밑그림이 남아있어

 

 

 

 

 

클림트는  '빈 분리파' 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충실하지 못한것을 알고는,

 

1905년에  '빈 분리파' 를 탈퇴하게 되.

 

하지만 이 사건은 그의 이른바 '황금시대'를 여는 시발점이 되었어

 

 

 

프리차 폰 리들러

 

 

아담과 이브

 

 

 

클림트는 이탈리아 라벤나의 모자이크와 장식적인 패턴, 금을 사용하여 눈에띄는 독창적인 양식을 발전시켰어.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실생활에 거리를 두고 신비로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매우 화려하고 ,역동적이며 에로틱한 요소와 강렬한 상징주의 등을 지속시켜 나갔지.

 

 

 

 

 


<Virgin>

 

 

 

<Mother and Child>

1905년작

 

 

 

<The Tree of Life>

생명의 나무..

 

 

 

 

 

클림트는 1918년 1월11일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은 후,

 

같은해 2월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고해.

 

그의 나이 56세였지.

 

 

 

 

작품 몇개만 더 소개하고 글을 마치도록할께.

 

 

<Forest of Beech Trees>

 

 

<베토벤 프리즈 의 마지막부분>

 

<헬레네 클림트의 초상>

1898년 작

 

 

 

<유디트 I>

표정이 참 아름답지 ?

 

<유디트 II>

 

 

 

 

<스토클레 저택의 벽화 中 <기대> <생명의나무><성취>>

생명의 나무는 아까 소개했던 그거야

 

 

 

<죽음과 삶>

1911년작

 

 

 

 

 

클림트는 자기 자신이나 작품을 글로 표현하는 일에

 

'배멀미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라고 말할만큼

 

글을 쓰는일 역시 어려워했어.

 

 

거기다가 화가라면 한두장은 남긴다는 자화상을 단 한장도 남기지 않았어.

 

 

클림트는 자화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어

 

"내 자화상은 없다, 나는 회화의 대상으로서 나 자신에 전혀 관심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 관심이 있고, 그보다 다른 형태에 대한 관심이 더 많다.

나는 스스로를 특별히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며 인물과 풍경 그리고 가끔 초상을 그린다"

 

라고 말할정도지.

 

 

3줄요약

 

1. 오랜만

 

2. 글쓰는거힘듬

 

3.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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