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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포로 / 역사 / 2차대전 ] 독일의 비참한 결말 - 시베리아에서 온 마지막 독일군 포로의 귀환 이야기.JPG

 

1945년 독일은 전쟁에서 패배했고 320만명의

독일인이 붉은군대의 포로가 되었으며 100만 이상의 포로들이 비공식적으로 포로접수 과정에서 총살이나 가혹행위로 죽었다고 추측된다.

 

 

1943년 이후로 독일군 포로는 꾸준히 증가했고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군 중부 집단군이 전멸하자 포로의 수는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1944년 이후 독일군 포로들은 모스크바 거리를

행진하고 시베리아나 중앙아시아의 포로수용소로

이송됐다.

 

 

독일군 포로들은 그들이 파괴시킨 도시의 복구를

해야만 했다

 

 

1955년 5월 5일 파리협약으로 주권을 되찾은 서독의 아데나워는 소련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받는다.

 

분단의 고착화를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데나워는 전쟁포로기념일까지  만들며 시베리아에 있는 독일동포들의 귀환을 원했기에 협상을 받아들였다

 

협상은 술술 풀려가기 시작했다. 아데나워는 다시 전쟁포로 문제를 언급하자 불가닌은 거의 지나가는 얘기처럼 이렇게 말했다. 

 

"좋소. 만일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들이 데려가시오." 

 

흐루시초프는 한마디 덧붙이는걸 잊지 않았다. 

"보증서나 확답을 줄 수는 없소. 문서상으로도 구두로도 말이오. 하지만 여러분에게 우리의 명예가 걸린 약속은 해드릴 수 있소. 그리고 우리의 말은 그만한 가치가 있소." 

 

'우리'란 곧 불가닌과 흐루시초프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들의 태도 변화에 놀란 아데나워는 재빨리 기회를 이용했다. 

 

"이분의 이야기라면 믿어도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구두 허가. 그게 전부였다. 서명도 없고 보증서 같은 것도 없었다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을 수가 있었을까? 대표단 안에서는 회의가 일기 시작했다. 

 

외무장관 브렌타노와 외무차관의 생각과 달리 키싱어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우리가 더 유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때 러시아인들이 포로를 석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러시아 대사를 본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것이고, 중간에 송환이 멈추면 모스크바에 파견된 대사가 귀환하면 되는 것이었니까요." 

 

뿐만 아니라 흐루시초프와 불가닌으로서도 언제까지나 소련 국내에 전쟁포로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주장만을 되풀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 스스로 전쟁포로들에 대해 '전범'이라는 말로 존재를 시인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남아있는 소련내의 반독여론은 정식 조약문과 같은 형태의 포로송환이 불가닌과 흐루시초프와 같은 이들의 지지기반 약화를 가져올 우려가 높았다. 그렇기에 포로는 송환하되 어디까지나 '비공문서화하여' 처리되길 바란 것이다.

 

 

귀환을 위해 정렬하는 독일포로들

 

 

 

양국은 서로 대사관을 개설하여 정식 외교 관계를 열 것을 합의하였다.

 

소련은 내심 오데르-나이세 국경선 합법화와 동독 정부의 법적 지위 인정이라는 두가지 조건을 추가로 요구하려 하였으나, 아데나워는 이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1955년까지 소련에는 9,626명의 포로가 남아 있었다.

 

그해 9월 말, 자유로 향하는 귀환 열차가 포로 수용소를 출발하였다. 이들은 우랄 산맥을 넘어 우크라이나, 폴란드, 동독을 지나 10월 9일, 조국으로 들어왔다.

 

 

수만명의 인파가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며 그들을 환영했고, 꽃을 선물하기도 했다. 버스는 보통 종종 보행속도로밖에 나아가지를 못했다.

 

죽었다고 여겨지던 이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환영인사를 하려고 덤벼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담배와 초콜릿, 과자 같은것을 차안으로 던져주었다. 그들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처녀들은-그들은 이제 겨우 20대 후반이었으니까 자기 주소가 적힌 쪽지를 차창으로 밀어넣기도 했다.

 

 

지나가는 마을마다 차는 머춰야 했고 심지어 어는 작은 도시의 시골길에서는 두 줄로 도열한 서독 국경경비대의 경찰들이 소총 대신 꽃다발을 들고 그들을 환영했다.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고 곳곳에는 굵은 글씨체로 휘황찬란하게 이런 글귀가 씌어 있었다. 

 

 

 

 

"조국의 아들들을 환영합니다."  

 

오랜 세월의 감옥살이 끝에 마침네 에른스트 귄터 솅크는 포로 대표로 마이크 앞에 서게 되었고, 이 극적인 순간에 전세계의 신문기자들이 들이대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여러분, 우리는 벅찬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눈물 보이는 것을 우리는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지난 10년간 우리는 울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우는 이유는 지난 10년간 겪은 고초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우리에게 보여준 이 사랑과 신뢰가 눈물을 흘리게 만든 것입니다." 

 

 

아버지를 처음으로 본 딸

 

1955년 풀리쳐상을 받은 독일군포로의 귀환 1942년 마지막휴가때 집에 온후 13년만에 귀환한 독일군 장교와 그가 처음보는 딸과의 상면장면 독일전체가 울음바다가 된 사진이었다.

 

 

포로들은 20대 초반에 전쟁터로 갔다가 40대가 되어서야 고향에 갈수있었다

 

민나 바브르치네크는 1944년 7월 휴가이후 11년만에 남편 칼 바브르치네크를 볼수있었다.

 

라트비아 무장친위대 출신자들

 

독일정부는 독일군 출신은 출신지를 막론하고 독일군으로 하루라도 복무한 사람에게 연금을 지급한다.

 

과거 독일군으로 싸웠던 외국출신 독일군들은 연금을 받으며 전쟁포로로 소련에 억류된 사람들은 보상금을 받았다.

 

구소련붕괘후 발트3국국민들중 독일군에 복무한 사람들에게도 연금이 지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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