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년 7월 6일,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낙인 찍힌 보헤미아의 성직자 얀 후스 Jan Hus가 화형당한다.
후스의 사제복은 모두 벗겨졌으며 머리 위에는 이단의 괴수(heresiacha)라는 글귀가 적힌 모자가 씌워졌다.
나무기둥에 묶인 후스를 모인 군중들은 조롱하며 침을 뱉었다. 교회는 그에게 최종적으로 신념을 버릴 것을 종용했으나 거부했다.
불길이 그를 삼켰고 이 불길은 이른바 후스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얀 후스 Jan Hus>
얀 후스는 교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재산권을 부정했다.
지방영주들과 세속의 왕들에게 교회의 재산권을 박탈하라 주장했다.
교황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회의 계급제도를 부정했다.
교황과 공의회가 내리는 교령은 세속의 권위일 뿐, 신앙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한다. 기독교도들은 성서의 복음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가르쳤다.
평신도들도 스스로 성서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사제들은 자기네들만 아는 라틴어로 된 성서를 읽으며 라틴어로 강연했다.
후스는 체코어로 번역 된 성서를 보급하여 평신도들에게도 성서를 손에 쥐어 주었다.
사제들과 평신도들은 동등한 공동체이며 차별이 있어선 안된다.
성찬식 때 평신도들은 빵만 허락되었을 뿐 포도주는 허락되지 못했다. 후스는 평신도들에게도 포도주를 허락했다.
면죄부를 강경하게 비판했다.
이 면죄부야말로 교황의 더러운 탐욕과 카톨릭의 부패를 상징한다고 외쳤다.
<면죄부>
후스의 사상은 일반 평신도였던 농민, 상인 등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큰 지지와 호응을 불러일으켰고
교회의 성직자들이 설치는 꼴을 보기 싫었던 보헤미아의 소귀족들도 동조했다.
교회는 당황했다. 예전에도 존 위클리프가 교회를 비판한 적이 있었으나 교회의 강압에 결국 굴복했다.
하지만 후스는 달랐다.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겠노라 맹세했고 교회는 그에게 이단 혐의를 씌워 불태워 죽였다.
그가 일생을 바쳐 번역했던 체코어 서적들도 모두 불태워졌다.
이 화형소식에 체코의 "후스파" 신도들은 격분했고 곧 폭동으로 이어졌다.
1415년 후스파 귀족들이 콘스탄츠 결의문을 정면으로 거부하자 체코 각지의 후스파 농민들과 백성들이 봉기했다.
일반 평신도에게도 포도주를 허락한 후스의 가르침을 따라 포도주를 담은 성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
1419년 프라하에서 강경 후스파들이 시 의회 의원들을 창문 밖으로 투척해 살해했다. 제1차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다.
<그림은 1618년 제2차프라하창문투척사건>
200년 뒤 황제의 관리들은 또 다시 프라하 시청에서 창 밖으로 던져진다.
대화과정에서 해결이 안 될 경우, 상대를 창 밖으로 던지는 것은 체코민족의 오랜 풍습.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Sigismund 는 체코인들의 저항을 용납하지 않았다.
휘하 영주들과 기사들을 소집해 곧장 진압에 나섰고 소식을 들은 로마 교황청 또한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교황 마르티노 5세와 황제는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는 카톨릭 국가들에게 십자군 소집령을 내렸다.
같은 기독교국가인 보헤미아를 대상으로, 같은 기독교도인 체코인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박멸하기 위해
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기사들이 몰려들었다.
교황이 십자군 소집령을 내렸다는 소식은 잠자코 있던 소극적 후스파들도 들끓게 만들었다.
각지의 농민들이 농기구와 변변찮은 무기를 들고 집을 나섰고
급진적인 후스파 사제들은 평신도들에게 무기를 들고 일어나라 호소했다.
교황의 횡포에 대항하기 위한 의용군은 삽시간에 불어났고 그 지휘관 중 하나가 용병으로 잔뼈가 굵은 군인이었던 얀 지슈카였다.
<얀 지슈카 Jan Žižka>
얀 지슈카는 보헤미아의 몰락 귀족 출신으로써 유럽 각지의 내전에 용병으로 참전했으며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독일 튜튼 기사단이 맞붙은 그룬발드 전투에서 폴란드 연합의 용병으로 참전해 튜튼 기사단을 격파한
전적이 있는 노련하고 전략적인 용맹한 군인이었다.
한 쪽 눈을 전쟁터에서 잃었기에 그를 가리켜 "외눈박이 지슈카" 라고 불렀고 애꾸눈 안대, 철퇴는 그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룬발드 전투에서의 얀 지슈카>
보헤미아 왕 바츨라프 4세의 군사고문이었을 시절, 프라하에서 활동하던 얀 후스의 사상에 깊게 심취 된 지슈카는 후스의 열렬한 신봉자가 된다.
1415년, 지기스문트의 간계에 속아 얀 후스가 화형당하자 격렬하게 반발했고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으로
사실상 독일제국과의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강경 후스파 신도들을 이끌고 봉기하고
1420년, 보헤미아 남부 산악지대 타볼 요새에서 십자군 기사들의 박해를 피해 몰려든 피난민들과 후스파 신도들을 모아 타볼 동맹군을 결성.
본격적으로 후스 전쟁에 뛰어든다
지슈카는 용병시절 경험과 그룬발드 전투의 승리로 기사의 전투력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시대 기사의 갑옷의 방어력은 최절정에 달하고 있었고 완전무장한 기사들이 기마돌격을 개시하면 훈련 받지 못한 보병대는 결코 견뎌낼 수 없었다.
자신의 곁에 모여든 타볼군은 대다수가 농민에 불과한 백성들. 평지에서 정면으로 맞붙는 다면 백이면 백 패배하리라.
노련한 용병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승리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저들의 약점은 무엇인가? 또 우리의 가진 것은 무엇인가?
지슈카는 모여든 후스파 농민병들이 전의만은 높다는 데에 주목했다. 비록 훈련도는 낮은 농민병들이었지만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침략자를 물리치기 위해 자발적으로 자원한 사람들이었고 신앙에 기초한 전의는 왕의 병사들보다는 훨씬 높았다.
이들을 이끌고 기사들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그들을 하나로 단결시키고 전의를 십분 활용하기 위해 지슈카는 군대의 규율을 정했다. 깃발과 나팔을 신호로
지휘자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훈련시켰고 전진과 후퇴, 부대의 이동과 공격개시의 명령을 휘하 부대에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이러한 훈련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한 군사훈련이었으며 지슈카의 군사학은 전근대적인 당시의 군사전략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농민병들을 굳이 익숙하지 않은 칼과 창으로 무장시키기 보다는 평소 쓰던 도리깨를 전투용으로 강화해 무장하게 했다.
또한 기사들과 평지의 야전에서 정면으로 맞붙을 경우, 승산이 없음을 잘 알았기에 수레진(Wagenburg)이라는 그의 독창적인 전술을 도입했다.
이것은 농업용 마차를 전투용으로 개조하여 철판을 덧대어 방어력을 보강한 뒤
여러 대의 수레를 잇대어 붙임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요새를 즉석에서 만드는 전술이었다.
<수레의 구조>
수레에는 총안을 내어 총포와 석궁을 발사할 수 있게 개조했고 수레의 바깥 쪽에는 내릴 수 있는 문을 내어
유사시 전술적인 기동을 용이하게 했다.
이 수레들은 각각의 모서리를 연결하여 결속력을 공고히 했고 보강 된 방어력과 결속력으로 수레진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각 수레진의 병사들은 16~20명으로 석궁병 4~8 명, 총병2 명, 파이크 병 또는 도리깨로 무장한 농민병 6~8명으로 구성되었다.
지슈카는 발전하고 있는 화포와 총기의 성능을 높이 평가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원시적인 성능의 소형 총이었지만 특별한 훈련없이 농민도 손 쉽게 쓸 수 있었고
기존의 총병들이 평지에서 고작 한 두발 쏘고 기사들의 육박전에 와해되는 문제점을 수레진 전술로 보완했다.
<수도멜 전투 Sudoměř >
전략과 전술은 완성되었다. 이제는 적을 섬멸할 차례였다.
행군하던 타볼 군을 발견한 십자군 기사 2000명이 공격을 감행해왔다.
상대가 농민병에 도리깨를 들고 심지어 아이와 여자까지 있는 걸 본 십자군은 코웃음 쳤다. 볼 것도 없는 잔챙이들이다.
특이하게도 수레가 많았지만 오히려 그 꼴이 군대가 아니라 상인 행렬 같아 보였다. 돌격 나팔이 울리고 기사들이 일제히 돌격했다.
지슈카는 침착하게 나팔과 깃발을 신호로 병사들을 통제했다. 전투수레 12대로 원형방진을 짠 방어진은 하나의 요새와도 같았다.
지축을 뒤흔드는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에 질린 병사들이 얼굴색이 변했다. 기병의 위압감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말발굽 소리, 기병들의 함성소리, 번뜩이는 창검과 갑옷, 차츰차츰 가까워져 오는 위압적인 크기.
석궁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배였고 총을 겨눈 손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옆의 동료가 긴장하며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얀 지슈카는 병사들을 다독였다.
"겁 먹지 마라! 내 신호를 기다려라!"
적병과의 거리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투구를 쓰지 않은 기사의 눈동자가 똑똑히 보일 때, 얀 지슈카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쏴라!"
숨 죽이고 있던 대포와 총, 석궁들이 일제히 발사됐다. 흉악하게 날아간 대포알은 기사의 몸뚱아리와 말의 몸을 갈기갈기 찢고 지나갔다.
지근거리에서 발사되는 석궁과 총탄은 기사의 갑옷도 능히 뚫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수십기가 죽어나자빠졌지만 기사들은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수레를 향해 돌진했다.
랜스가 수레를 강타했지만 철판을 덧대어 보강한 전투용 수레는 그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황한 기사가 우물쭈물 할 때 수레 위의 농민병들이 내려다보며 창과 도리깨를 강타했다.
수레진 전술은 평지에서의 돌격전에만 익숙해져 있던 기사들을 난데없는 공성전 상황으로 끌어들였다.
공성전에서의 기병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것. 순식간에 수레진 앞에는 기사들과 말의 시체들로 가득 쌓였고
예봉이 꺾인 기사들은 일단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서 재정비를 시도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적병을 살피던 지슈카의 눈이 번뜩였다. 바로 이때를 기다렸다. 그의 명령에 수레가 이동하고 통로가 생겼다.
그 틈으로 그 동안 수레진 안에서 팔팔하게 쉬고 있던 기병들과 대기하던 농민병들이 일제히 쏟아져나갔다.
놀란 기사들이 황급히 전열을 갖추려 해봤지만 후방에서 달려드는 농민병들에게 하나 둘씩 쓰러져나갔다.
갈고리로 말에서 끌어내리고 도리깨로 후려치면 제 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은 기사라 한들 도리가 없었다.
영지에서 말을 타고 거드름을 피우며 무시하던 그 농민들에게, 고귀한 기사들이 진흙 뻘 밭에서 목숨을 구걸하며 개처럼 죽어갔다.
얀 지슈카는 공성전에만 쓰이던 대포를 최초로 야전에서 끌어다 썼다. 평지에서 보병들을 유린하던 전투밖에 모르던 기사들은
수레로 보호되는 방어벽 위에서 쏟아지는 막강한 대포의 화력에 견디지 못했다.
이런 양상으로 얀 지슈카는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수도멜과 네크미르 전투에서 각각 2천명의 기사들을 박살냈다.
1420년 6월 12일, 지그스문트 황제의 대병력에 포위 된 프라하가 도움을 청해왔고
지슈카는 즉시 구원에 나선다. 도시 외곽 비트코프 Vítkov 언덕에 진을 친 얀 지슈카는
목재로 된 요새를 돌과 진흙 벽으로 보강했다. 십자군 기사들이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얀 지슈카의 타볼군은 격렬히 저항했다.
십자군의 공세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을때 후스파의 별동부대가 포도원을 가로질러 십자군의 측면을 쳤고
격렬한 공격에 요새의 북쪽 절벽 아래로 몰린 십자군은 비명을 지르며 와해된다.
300명의 기사가 죽었고 황제는 프라하 시 공략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지슈카는 언제나 승리했다. 황제의 추종자들과 카톨릭파는 계속해서 덤벼들었으나 천재적인 군사전략가인 지슈카는 열세의 상황에서도
언제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극단적인 방어전략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수레진에만 집착하지 않았고
과감한 기동을 해야 할 때는 망설임이 없었다. 지기스문트 황제와 그 적들은 단 한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얀 지슈카의 주요 전투>
이후 후스파가 분열하여 내전에 휩싸이고 지슈카는 부상으로 남은 한 쪽 눈마저 잃고 완전한 맹인이 되지만 계속해서 싸움에 임했다.
그 왕성한 전투정신과 지칠 줄 모르는 용기는 그 적들로부터 찬사를 이끌어냈다. 그들은 지슈카를 가리켜
"인간은 결코 죽일 수 없는 존재. 신만이 그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라며 두려워했다.
지슈카는 1424년 10월 11일, 모라비아 공략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한다.
타볼군은 스스로를 "고아"라 칭하며 아버지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이후 후스파는 내전을 거쳐 온건파가 승리하는 등 진통을 거치면서 결국 카톨릭과 화의를 맺고
1436년 이그라우 협정에서 빵과 포도주를 모두 먹는 후스파의 의식을 허락받으며 전쟁을 끝낸다.
현재 체코 국민들은 프라하와 그의 군사적 발상지가 되었던 타보르에 그의 동상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