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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10월 5일, 파리는 데모와 폭동으로 들끓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는 끝났지만 여전히 파리는 혁명의 후유증과 공포정치의 잔재로 피냄새가

 

진동하고 혼돈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로베스피에르를 축출한 테르미도르 정권의 인기는 바닥을 기고 있었고 혁명파의 이런 상황을 기뻐하며

 

파리 곳곳에서 왕당파들이 활보하며 혁명정부를 조롱하고 왕국만세를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다가오는 선거에 패할까 두려웠던 혁명정부는 "삼분의 이"법을 통과시킨다. 이 법은 선출되는 

 

선출되는 750석의 의석 중 500석을 국민공회 의원 중에서 선출해야 된다는 말도 안되는 법이었다.

 

 

 

<방데미에르 반란>

 

 

이 법의 통과소식에 파리 곳곳의 왕당파는 격분했고 이에 동조하는 국민방위군까지 나와 폭도들의 수는 순식간에 3만명으로 불어났다.

 

파리 내의 혁명파 정부군은 불과 5천명에 불과했고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기병 중위였던 조아생 뮈라는 사령부 앞에서 그의 부하들과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작달막한 키의 볼품없고 해진 제복의 장군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귀관이 조아생 뮈라인가?"

 

"그렇.... 습니다만.."

 

 

 

 

말 위에서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남자의 태도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상관. 예의를 차릴 수 밖에 없었다. 어디 출신인지 고약하기 그지없는 사투리지만 참아 줄 만 했다.

 

 

 

 

"기병 장교로군. 맞지?"

 

"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자네의 기병대를 이끌고 사블롱 평원으로 가라. 거기에 대포 40문이 있다. 당장 이곳으로 끌고 오도록."

 

"네? 장군님, 하지만 지금 전..."

 

"뮈라! 지금부터 자넨 내 명령에 따른다! 가라!"

 

 

 

 

 

위압적인 호통에 깜짝 놀란 뮈라는 투덜거리면서도 명령대로 2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사블롱 평원으로 갔다.

 

과연 그곳에는 대포들이 있었다. 40문의 대포는 뮈라에 의해 신속하게 튈르리 궁 방어선에 배치됐다.

 

진압군은 병사들은 밤새 방어선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대포를 배치하고 머스켓병들을 깔았다.

 

 

다음 날 새벽 5시, 허공에다 대고 머스켓을 쏘며 살기등등한 고함을 내지르는 폭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새 폭도들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찢어버린 삼색기, 프랑스 혁명의 상징인 삼색모를 창에 꽂은 채로 전진해왔다.

 

 

 

"프랑스 왕국 만세! 국민공회는 즉시 해체하라!"

 

"불법적인 입법을 일삼는 국민공회는 해체하라! 국왕폐하 만세!"

 

 

뮈라는 불안하게 진압군을 지휘하는 장군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무표정하게 몰려드는 폭도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진압군이 별 반응을 안 보이자 자신감이 생긴 폭도들이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달려오며 쏘는 총알이 바리게이트에 부딪혀 파편을 튀겨댔다.

 

남자가 오른손을 들었다. 대포를 조작하는 포병들이 조용히 응시했다. 마침내 폭도들과 바리게이트의 거리가 0에 가까워졌을때

 

남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손을 내리며 외쳤다.

 

 

 

"발사!"

 

 

 

 

 

대포에는 산탄이 장전 되어 있었고 포구에서 뛰쳐나간 쇠구슬들은 달려들던 폭도들의 몸뚱아리를 갈기갈기 찢었다.

 

포격으로 수십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몸을 일으킨 소총수들의 일제사격으로 벌집이 되어 죽어갔다.

 

산탄포가 시내 건물 곳곳에 작렬하며 파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지만 나폴레옹은 개의치 않았다.

 

몰려드는 폭도들을 격퇴한 뒤 전진하여 반격을 가했고 새벽부터 시작 된 전투는 진압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왕당파 반란은 처참한 사상자를 내며 실패로 끝났다.

 

 

 

이 반란진압으로 자코뱅이라 낙인찍혀 출세길이 막혔던 나폴레옹은 혁명정부의 주목을 받았고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뮈라 또한 이 때의 인연으로 나폴레옹의 최측근이 되었고 그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조아생 뮈라>

 

1796년,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원정군의 사령관으로 발탁되었고 뮈라도 이때 그의 전속부관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원정대는 북이탈리아를 침공해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고  밀라노를 점령했다. 

 

연전연승으로 더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버틸 수 없게 된 오스트리아는 라인강 서안 영토를 떼줌으로써 프랑스와 강화한다.

 

이 전쟁으로 나폴레옹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1798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5만명의 병사를 데리고 이집트 원정을 떠난다.

 

 

<피라미드 전투>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는 침략군을 격퇴하기 위해 그들이 자랑하는 맘루크 기병대를 보냈다.

 

화려한 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기병용 권총을 난사해대며 달려드는 맘루크 기병대에 맞서 프랑스군은 사각방진으로 대응했다.

 

총검을 빽빽히 세워 마치 고슴도치처럼 틀어박힌 사각방진은 사실상 이 시대 어느 기병도 돌파가 불가능했다.

 

전근대적인 기병전술에 집착하던 맘루크 기병은 패퇴했다.

 

7월 25일 나폴레옹은 카이로를 점령했고 사실상 이집트 정복을 완료했다. 

 

그러나 넬슨의 함대에 의한 프랑스 해군의 전멸과 보급로의 난항, 이집트 원주민들의 폭동으로 인해

 

계속되는 전투의 연전연승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프랑스로 되돌아갈 생각을 굳힌다.

 

 

 

 

 

 

1799년 7월 25일, 셰이드 무스타파가 이끄는 2만명의 오스만 투르크 군이 영국해군의 배에서 상륙했고

 

긴 항해로 지친 오스만 군을 재빨리 격파하기 위해 프랑스 군은 오스만 군의 방어선에 공격을 감행한다.

 

아직 완성하지 않은 제1방어선은 수월하게 돌파했으나, 이미 완벽히 구축해 놓은 제2방어선은 저항이 격렬했다.

 

프랑스군은 일시 후퇴했고, 방어선의 오스만군은 프랑스 군을 조롱하기 위해 요새 방어선에 널부러진 프랑스 부상병들의 목을 잘랐다.

 

바로 그때 뮈라의 눈이 번뜩였다. 휘하의 기병대에 돌격명령을 내렸고 그 자신이 가장 먼저 요새에 뛰어들었다.

 

놀란 오스만 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황급히 다시 방어선으로 들어가 전열을 갖추려 했지만

 

뮈라가 더 빨랐다. 손쉽게 방어선을 돌파한 뮈라는 그대로 질주, 순식간에 사령관 무스타파의 텐트까지 쇄도했다.

 

 

<2차 아부키르 전투>

 

 

무스타파는 황급히 허리에 찬 권총을 꺼내들었다.

 

뮈라는 한눈에 이 늙은 노장이 사령관임을 알았다. 그의 기병도가 높이 들렸다.

 

무스타파의 두 손가락이 잘려나갔고 그가 쏜 권총은 뮈라의 턱을 스쳤다. 치명상은 아니었다.

 

 

오스만 군은 완전히 붕괴되어 후방의 영국 함선으로 도망쳤으나 대부분이 항복하거나 죽었다. 오스만군 8000명이 죽었다.

 

 

 

 

오스만과 영국군의 저항을 분쇄한 나폴레옹은 무사히 프랑스로 돌아왔고 그에게 시에예스 총재가 접근해왔다.

 

그는 자신을 도와 쿠테타를 일으킬 것을 종용했고 어차피 나폴레옹 또한 이집트 원정의 총체적인 실패로 입지가 위태로웠기에

 

쿠테타에 동의한다. 1799년 11월 9일. 나폴레옹은 자신을 따르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총재 정부를 전복시켰다.

 

 

<오백인 회의를 장악하는 나폴레옹과 근위 척탄병들>

 

 

이때 오백인 회의 의원들은 독재타도와 헌법 수호를 외치며 나폴레옹에게 달려들었고

 

뮈라가 이끄는 척탄병들이 이를 제지했다. 뮈라는 휘하 척탄병들을 이끌고 오백인 회의에 난입, 반대하는 의원들을 무력으로 찍어누르며

 

쿠테타를 성공시켰다. 이때의 이 공으로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고 그의 여동생 카롤린과 결혼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제1통령에 취임, 사실상 프랑스의 제1권력자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나폴레옹의 최측근이 된 뮈라는 사실상 그의 기병대 돌격대장이 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기병 사령관으로써의 뮈라의 눈부신 전설이 시작된다.

 

 

 

 

 

 

1800년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기병대를 맹렬히 공격해 궤주시켰다.

 

뮈라에게 패해 도망간 오스트리아 기병대는 후방의 보병대를 가로질러 도망쳤으며

 

이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진 오스트리아 군은 결국 패배했다.

 

 

 

1805년, 마크 대공이 울름에서 후방의 러시아 군을 기다리며 틀어박혀 있을때 경이적인 속도로 기동하여 울름의 동쪽 측후방으로 파고드는데 성공한다.

 

기병대의 성공적인 기동으로 나폴레옹은 울름 포위망을 완성하고 4만명의 오스트리아 군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항복한다.

 

이때의 패배는 대불동맹군에게 치명적인 손실로써 사실상 대불동맹군의 날개 중 하나였던 오스트리아군이 떨어져 나갔음을 의미했다.

 

오스트리아라는 날개가 뜯겨져 나간 러시아군은 아우스터리츠에서 프랑스에게 패한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2800명의 기병 예비군단을 이끌고 패주하는 프로이센 군을 철저히 궤멸시켰다. 

 

프로이센 군의 주력은 사실상 이 전투에서 전멸했고 프랑스 군은 베를린에 입성한다.

 

 

 

 

 

 

그러나 그를 가장 빛나게 하는 전공은 따로 있다. 

 

 

바로 1807년 아일라우 전투로서 프랑스 군 7만 4000명과 러시아 프로이센 연합군 7만 6000명이 맞붙은 대전투였다. 

 

형편없는 도로망과 맞지 않는 지도 때문에 적을 찾기 위해 군대를 분산했던 나폴레옹은 4만명 가량의 병력으로 6만명에 달하는 러시아 군과 맞붙게 된다. 

 

황은 시시각각 프랑스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 

 

러시아군의 강력한 포화가 프랑스 군 진영에 쏟아부여졌고, 러시아 군 우익이 프랑스군 좌익을 압박했다.

 

다부의 3군단이 러시아 군의 거센 견제에 돈좌되고, 7군단의 공격도 거센 눈보라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악랄한 시계로 실패한다.

 

군단과 각 사단이 시시각각 붕괴되고 러시아 군의 눈에 나폴레옹 황제의 군기가 들어왔다.

 

나폴레옹 최대의 위기. 나폴레옹은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옆에 있던 뮈라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뮈라는 남은 예비 기병대와 근위 기병대를 프랑스군 중앙에서 집결시키고 돌격 제대를 2개 주력 부대, 총 80개 제대로 나누었다. 

 

전방에는 러시아군이 3열로 전진해 오고 있었다. 거센 눈보라와 전장 곳곳에서 울리는 대포소리 총소리 비명소리를 들으며

 

뮈라는 눈을 감았다. 그의 기병도가 하늘 높이 들리고 지켜보던 병사가 나팔을 입에 물었다.

 

잠시 후 뮈라는 세계 전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인 기병 돌격을 명령했다.

 

 

"돌격!"

 

 

 

 

 

 

돌격 나팔소리가 울리고 기병대가 일제히 기병도를 빼들고 돌격했다. 11000여명에 가까운 대 병력이 전진해오는 러시아군을 향해 돌격했으며

 

방심하고 있던 러시아 군은 허를 찔려 당황했다.

 

황급히 제압사격을 실시하려 했으나 눈보라로 인해 시계가 제한되는 머스켓 사격은 기병대에게 아무런 지장을 주지 못했다.

 

뮈라의 기병대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어 거대한 송곳니와 같이 러시아군 전열을 후려쳤다.

 

 

 

 

 

 

대 기병 사각방진으로 맞서려 하는 연대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진형을 갖추기도 전에 프랑스 군 기병대가 뛰어들었다.

 

진형을 갖추지 못한 보병대는 결코 기병대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거세게 몰아치는 말발굽에 러시아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고 기병대의 칼은 쉴새없이 피를 뿌렸다. 

 

이 무지막지한 돌격에 보병대를 지원하던 러시아 기병대도 휩쓸려 지나갔고 후방의 포병대가 무력화 되었다. 

 

러시아 군 전열은 완전히 관통되었고 황급히 다시 전열을 갖추려는 러시아 군에  프랑스 기병대는 후방에서 다시 반전하여 재차 돌격한다.

 

또 한번 기병대에 휩쓸린 러시아 군은 완전히 전열이 찢겨졌고 더 이상은 전투를 지속할 수 없었다.

 

다 이긴 전투에서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러시아 군은 후퇴했고 궤멸적인 패배로 끝날 뻔한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뮈라는 당대 최고의 기병 지휘관이었다. 그는 적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는 법이 없었고 항상 선두에서 칼을 빼들고 돌격했다.

 

1807년 하일스베르크 전투에서는 적 포병대에 정면으로 달려들다가 산탄포에 말이 죽어나자빠지고 다시 다른 말로 갈아타기도 했다.

 

용맹, 과감, 본능적인 돌격정신.

 

이런 그의 매력은 적이었던 코사크 기병들에게도 존경과 경의를 불러왔다.

 

 

하지만 사실 돌격대장으로서의 그의 무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으나 군 지휘관, 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기대 이해였던 걸로 보인다.

 

나폴레옹은 그를 두고

 

"적과 대치했을 때는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이지만, 회의장에만 들어서면 판단력도, 결단력도 없는 얼간이가 돼 버린다." 라고 혹평했고

 

그의 무모한 돌격에 짜증이 난 르네 사바리 장군은

 

"뮈라가 좀 덜 용감하고 좀 더 상식이 있었다면 우리 군대를 위해 훨씬 좋았을 것." 라고 하기도 했다.

 

 

 

 

 

 

 

어쨌든 전설 적인 기병대장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그였지만 그에게도 몰락은 다가왔다.

 

1812년의 러시아 원정에서 가장 피튀기는 혈전이었던 보르디노 전투에서도 기병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웠으나 

 

그 이후 러시아원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난 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몰락이 확실해지자 그를 배반하고 연합국 측에 붙는다.

 

자신의 나폴리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그나마도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트 4세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쫓겨난다.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탈출해 다시 황제에 오르자 뮈라는 재기의 기회로 삼고 자신의 병력 5만명을 탈탈 털어 이탈리아 북부의 오스트리아군과 맞선다. 

 

그러나 나폴레옹 없는 뮈라는 결국 뮈라일 뿐이었는지 철저하게 패배하고 코르시카로 도주한다.

 

이후 칼리브리아(Calabira)에서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페르디난트 4세에게 붙잡혀 총살당하고 만다. 

 

화려했던 전성기에 비해 말년은 상당히 찌질했지만 시대의 풍운아 답게 죽음 앞에서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을 겨눈 소총수들에게 당당하게 사격명령을 내렸다.

 

 

 

 

 

"병사, 임무를 수행하라! 얼굴은 노리지말고 - 가슴을 겨냥해서 - 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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