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대기근
-1670년(경신년) ~ 1671년(신해년) 사이에 발생한 대기근.
경신년과 신해년의 앞글자를 따서 "경신"대기근이라고 부른다.
*대기근의 시작
1670년 초부터 불길한 징조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햇무리 현상(옛날 사람들은 햇무리가 지면 그 다음날 비가 내린다고 믿었다)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 해의 양쪽에 2개의 고리가 생기는 현상)가 있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1월 1일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밤에 화성이 방성(房星, 전갈자리)을 범하였다. (햇무리 현상은 1월 한 달 내내 계속 관측되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1월 18일
태백(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번갯불 같은 붉은 빛이 짙은 구름 속에서 나와 곧바로 서쪽을 향하였는데, 빛이 땅을 비추고 소리가 있었다.
유성인 듯하다고 하였다.
-현종개수실록 22권, 11년(1670년) 1월 8일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견우성) 위에서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1월 10일
전라도 영암군(靈巖郡)에 작년 12월 12일 밤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창문이 모두 흔들렸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1월 4일
경기의 교동(喬桐, 교동도)에서 이달 21일에 지진이 있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2월 24일
경기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에서 이달 23일에 지진이 있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2월 28일
경상도 안음(安陰, 함양)과 거창(居昌)에 윤달 2월 16일에 지진이 있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3월 4일
*경신대기근
그리고 불과 몇주 후,
굶주림과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었다.
#당시 기록
평안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전염된 자가 1천 3백 명이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2월 11일
충청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2월 15일
경상도에 전염병자가 1천 명이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3월 7일
제주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연달았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4월 5일
충청도 홍산(鴻山) 등의 읍에 전염병이 심하게 일어나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때 기근을 치른 끝에 전염병까지 겹쳤으므로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12월 11일
경기 지역에 전염병이 심하게 발생하여 1백 20여 명이 사망하고 소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수가 또한 1백 20여 마리였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12월 18일
충청도 임천(林川) 등의 읍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백 20여 명이었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12월 29일
황해도에 7월 이후 병에 전염된 자가 1천 6백 9명이었다.
-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1671년) 8월 17일
전라도에 7월 중 병에 전염된 사람의 수는 1만 1천 8백 81인이었고 죽은 자는 2천 7백 43인이었으며, 굶주려 죽은 백성이 2천 2백 79인이었으며, 장흥(長興) 등 열일곱 고을에서 한 달 동안에 우역으로 죽은 소가 1천 39두였다.
-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1671년) 8월 19일
귀한 집이건 천한 집이건 독한 여역(열병)이 두루 차서 마치 불이 치솟듯 하였으므로 일단 여역이 걸린 자는 열에 하나도 낫는 자가 없고 심지어는 온 가족이 다 죽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놀라고 황급하여 분주하는 것이 마치 병화(兵火, 전쟁으로 발생한 화재)를 피하는 것 같았는데 그 경황의 비참함이 이러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3월 18일
이때 내간(內間)의 궁인(宮人) 중에서 의심스러운 병 때문에 질병가(疾病家)에 내보냈던 자가 잇따라 죽었고, 도성의 사대부로서 전후 죽은 자도 수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온 집안이 모두 전염되어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낫지 않았다. 동서 활인서(東西活人署)와 각처의 사막(私幕)에서 병을 앓다가 죽은 자와 길에 쓰러진 주검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각부(各部)에서 죄다 묻지 못하고 구덩이에 가져다 두는데 동서교(東西郊) 10리 안에 쌓인 주검이 언덕을 이루고 빗물이 도랑에서 넘칠 때에는 주검이 떠서 잇따라 내려갔다. 도성에서 이처럼 사람이 죽는 참상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5월 20일
비국(비변사)이 아뢰었다.
“동·서활인서에 지난 달 이후로 전염병이 더욱 번져 성 밖으로 나간 병자 움막의 수가 날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별도로 구제하는 조처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 그 때문에 낭청을 나누어 파견하여 사실을 조사한 후, 지난 달 17일 이후로 매일 양식미를 나누어 주어 29일에 이르러 주기를 끝마쳤습니다. 두 활인서에서 관할하는 대상과 동서 성밖의 사막(私幕)의 병자들이 어른 아이 합하여 1만 9천 5백 28명입니다.진휼청의 쌀을 가지고 어른은 두 되, 아이는 한 되씩 쌀과 좁쌀을 나누어 주니, 도합 2백여 석이었습니다.”
-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1671년) 6월 3일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자연재해까지 일어났다.
평안도 평양(平壤)에 이달 9일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오리알만 하였고 땅에 반 자[尺]나 쌓였으며, 네살 된 아이가 우박에 맞아 즉사하고, 꿩·토끼·까마귀·까치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강서(江西)·중화(中和)·선천(宣川)·곽산(郭山)·증산(甑山) 등 고을에 같은 날 우박이 내려 벼가 남김없이 피해를 받았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현종실록 18권, 11년(1670년) 5월 13일
경상도에 큰물이 졌는데 낙동강 일대가 더욱 심하게 침수되었다.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아래 백 년된 큰 나무들이 거의 다 떠내려갔으며언양(彦陽) 등 여섯 고을은 수백여 집이 침수되어 무너졌는데 빠져 죽은 자가 50여 명이었으며, 남해(南海), 양산(梁山) 등지에는 언덕이 무너져 깔려 죽은 자가 7명이었다. 상이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현종 18권, 11년(1670년) 8월 11일
새벽부터 큰비가 사납게 쏟아지다가 아침이 넘어서야 그쳤다. 성안의 크고 작은 도랑이 모두 불어 넘쳐서 다리가 무너지고 거리가 내를 이루어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인경궁(仁慶宮) 앞의 다리가 갑자기 무너져 죽은 자가 네 사람이나 되었다. 성안의 수재의 참상은 근고에 없던 것이었다.
-현종 18권, 11년(1670년) 7월 15일
대기근의 피해가 너무 심각해서
노인들이 임진왜란 때보다 더 참혹한 상황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三南 - 충청, 호남, 영남)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2월 25일
17세기 제주읍성의 모습
피해가 제일 심각했던 지역은 바로 제주도였다.
토양이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아서 호남에서 쌀을 들여오던 지역이었기 때문에 그 피해는 다른 지역보다 더 심했다.
이때 제주도민의 20~30% 정도가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목사 노정(盧錠)이 치계(보고)하기를,
“본도(本島, 제주도) 세 고을 민생의 일은 이미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모든 백성이 산에 올라가 나무 열매를 줍는데 나무 열매가 이미 다하였고 내려가 들나물을 캐는데 풀뿌리가 이미 떨어졌으므로 마소를 죽여서 배를 채우고 있으며, 무뢰한 자들은 곳곳에서 무리를 지어 공사간의 마소를 훔쳐서 잡아먹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리하여 서로 사람들끼리 잡아먹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으니 비참한 모양을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8월부터 죽을 장만하여 구제하고 있으나, 창고의 곡식이 이미 다하여 4만여 명의 굶주린 백성을 다시금 구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해안 고을의 소금을 넉넉히 들여 보내소서. 전일 옮겨 온 5천 석의 곡식은 많지 않은 것은 아니나, 1, 2월 두 달의 진휼할 거리도 모자라므로 3, 4월에는 한 되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이어서 진구할 방책을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1월 30일
*조선 정부의 늑장대처
그러나 조정의 늑장대처로 전국의 많은 백성들이 구휼미가 오기도 전에 굶어죽었는데,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정에서 전라도에 있는 호조 소금 5백 석과 상평청(常平廳)·통영(統營) 및 양남(兩南, 호남과 영남)의 사복시 목장 등의 곡식 7천 석을 획급(劃給)하여 전라 수영의 병선(兵船)으로 실어 보내게 하였다. 그런데, 해로가 멀고 풍파에 오래 막혀서 지난해 초겨울에 부친 장계가 이제야 도착했고 전후로 곡식을 나르는 배도 제때에 미처 도달하지 못하여 굶어 죽은 섬 백성이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1월 30일
이때 많은 백성들이 굶어죽었지만, 당시 지방관리들이 왕으로부터 구휼을 잘했다고 칭찬받기 위해
사망자의 수를 실제보다 적게 보고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구휼)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 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계문한(기록된)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2월 25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이런 지방관리들에게 상을 주는 일을 계속했다.
헌납 윤경교(尹敬敎)가 상소하였다.
"기근·여역으로 죽은 토착 농민까지 온 나라를 합하여 계산하면 그 수가 거의 백만에 이르고, 심지어 한 마을이 모두 죽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비록 임진·계사년 전란의 참혹함이라도 거의 이보다 지나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백성의 죽음이 이와 같은데 수령에게는 오히려 진휼을 잘했다고 금관·옥관의 자급을 주기도 하고 옥새가 찍힌 교지로 포상을 더해주기도 합니다. 만약 백성을 기르기를 적절히 하여 온통 흩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 사망이 매우 심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흩어진 자가 되돌아 오지 못하고 사망한 자는 이미 구제받지 못하였는데, 단지 글로 된 보고에만 의거하여 포상하는 은전을 지나치게 베풀고 있습니다."
-현종개수실록 25권, 12년(1671년) 12월 5일
예전 같았으면 부자들이 곳간을 풀어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줬겠지만,
이번에는 조정의 뻘짓으로 인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전일에는 외방에 부민(富民, 부유한 백성)들이 많이 있었기에 재앙과 흉년을 만나도 백성들이 개인 저축에 힘입어 살아났다. 그런데 십수 년 이래로 민간의 개인 저축을 관에서 무조건 빼앗아 백성들에게 흩어주었고, 가을걷이 후에 다시 거두어 돌려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치죄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민간에서 곡식을 저축하지 않았다. 지금은 온 나라에 곡식을 저축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 즉시 팔방에 알리어 곡식을 저축하게 하되, 무조건 빼앗는 폐단을 금하고 곡식을 많이 저축하는 사람은 자급을 올려주어 권장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백성에게 부(富)를 간직하게 할 수 있다.’
-승정원 동부승지(국토문제 담당) 이단하의 상소 내용-
-현종개수실록 24권, 12년(1671년) 7월 13일
지난 몇십년 동안 국가 재정이 부족할 때마다 조정은 부자들로부터 거의 강탈에 가까운 형식으로 많은 재물을 거둬갔기 때문에
예전에는 기부에 적극적이었던 부자들도 이 시기에는 기부라는 말만 나오면 거부감을 나타냈다.
*날아간 기회
피해를 줄일 기회가 없지는 않았다.
현종 12년(1671년) 6월, 병조판서 서필원이 청나라에서 지원을 요청하자고 했지만 대다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안팎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 국가의 위급한 형세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 외간에서는 조곡(糶穀, 곡물 지원)을 청하자는 의논이 많이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상이 허적(許積, 영의정)에게 물었다.
허적이 대답하기를,
“지난해 겨울부터 이 의논이 있었습니다만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이미 청한 뒤에 저들이 배로 실어나르기 어려운 데의 곡식을 허락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설사 우리 나라에서 가깝고 편리한 곳의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이 뒤에 저들이 기근이 들었다고 핑계대면서 실어나르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결코 감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곡을 청하자는 의논이 옳은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도 많이 불가하다 하였으므로 서필원의 의논이 드디어 행해지지 않았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6월 1일
병조판서 서필원: 청나라로부터 곡물을 지원받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의정 허적: 곡물을 받아온다고 해도, 청나라도 나중에 비슷한 핑계를 대면서 우리에게 곡물을 요구할 것입니다.
나머지 신하들 = 허적과 똑같은 의견
영의정 허적(현종 시절의 몇 안되는 실무형 관료 중 1명이었다. 김육과 함께 대동법의 탄생에 기여했다)
실제로 청나라는 "대기근이 발생한 것 같으니 쌀을 공짜로 좀 보내줄까?"라는 의견을 여러차례 표명했다.
그러나 이것을 내정간섭이라고 여긴 조선 조정에 의해 무시당했다.
2개월 후, 이번에는 현종이 비슷한 제안을 하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상(현종)이 이르기를,
“사신은 어떤 사람으로 차출하여 보낼 것인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여느 때의 일과 다르니, 대신을 차출하여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현종)이 이르기를,
"곡물을 청하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전일 서필원(徐必遠)이 아뢸 때에 신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수흥·민정중은 곡물을 청하는 것은 형세가 불편하고 사리가 부당하다고 아뢰었다.
민정중이 또 아뢰기를,
“국가가 남에게 부림받는 것은 면하지 못하더라도, 어찌 양식을 청하여 살기를 바랄 수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곳의 사세(대기근)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곡물을 빌린다 하더라도 6월 이전에 도착할지 알 수 없으니, 마침내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현종실록 19권, 12년(1671년) 8월 8일
현종: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청나라로부터 곡물을 지원받는 것은 어떻겠는가?
영의정 허적: 제 의견은 예전과 같습니다. (안 됩니다)
병조판서 민정중: 다른 나라에 양식을 구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현종: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은가.
병조판서 민정중: 곡물을 요청한다고 해도 일찍 도착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청나라에서 곡물을 들여오자는 제안을 했던 서필원은 2개월 전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상황이었다)
청나라에 곡물 지원을 요청한 것은 30년이 지난 숙종 때로, 을병대기근(1695년~1699년)이 한창일 때였다.
총 3만 석의 쌀을 지원받았는데, 그나마도 1670년대와는 다르게 "1만 석만 무상지원, 2만 석은 유상지원" 형식이었다.
청(淸)나라 이부시랑(吏部侍郞) 도대(陶岱)가 쌀 3만 석을 압령(押領)하고 중강(中江)에 도착하였다. 크고 작은 선박이 모두 1백 십여 척이나 되었는데,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이 국경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이르러 차원(差員)·장관(將官)·백성들을 이끌고 청나라 대궐을 향하여 고두 사은(叩頭謝恩)하니, 낭중(郞中) 한 사람이 최석정에게 한 통의 글을 전하여 내보였다. 그 글에 대개 이르기를,
“그대의 임금(숙종)이 해마다 기근이 들어 중강에 개시(開市)할 것을 간곡히 청하므로 황제께서 중신을 파견하시어 태창미(太倉米) 1만 석을 풀어 천리를 항해(航海)하여 구휼하게 하시고, 아울러 무역할 쌀 2만 석을 허락하시어서 그대 나라 만백성의 생명을 구제토록 하셨으니, 그대의 임금은 예(禮)로 보아 마땅히 몸소 황제께서 내려 주시는 것을 받아야 할 것이나, 오랜 질환으로 나올 수 없어 사자(使者)를 보내어 황제께서 주신 것을 대신 받게 하였으니, 사자는 의당 그대의 임금을 대신하여 배신(陪臣)을 보내어 내리신 것을 받고 북향하여 고두 사은한다는 뜻을 꿇어 엎드려 아뢰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향해에 노고가 많은 도대인(陶大人)에게도 감사하는 뜻을 표하여 천조(天朝)를 공손히 섬기는 예를 잃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통관(通官)을 시켜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자문 가운데 ‘몸소 직접 점검하여 받는다.’는 말이 있었으니, 대신은 쌀을 직접 영수한 후에 올라 가야 한다.”
하였다.
-숙종실록 32권, 24년(1698년) 4월 26일
#태창: 지금의 중국 장쑤성 타이창시
요약
1.조선시대 현종 시절에 경신대기근이 발생하여 100만명 가량이 굶어죽었음
2.조정의 늑장대처와 대신들의 쓸데없는 고집도 굶어죽는 백성들이 늘어나는데 한몫 했음
3.이 사건의 원인은 자연재해 50%, 인재(人災) 50%
4.중요한건 임진전쟁이랑 맞먹을 이런 내용은 한국사에 나와있지 않는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