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많은 게이들에게 고려는 가깝고도 먼 나라일 거야.
분명 우리역사이긴 한데 조선만큼 친숙하지도 않고
고대시대처럼 국뽕 떡밥이 많이 돌지도 않으니까ㅎㅎ

게다가 주구장창 침략 당하고 시달리다 망해버린 나라라는
선입견도 적잖이 퍼져 있어서 그닥 호감도 안가지.

 

허나 고려 역시 엄연한 우리 역사이고 그 시대의 우리 조상님들이
목숨을 던져가며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지 않았다면
거란-여진-몽고의 말발굽아래 사라져간 수많은 민족들 처럼
지금의 '한국인'은 없었을 지도 몰라.

 

그렇기에 고려시대가 비록 신명나는 리즈시절은커녕
분통터지는 답답한 시련기로 점철된 500년지만
우리에게 더더욱 소중한 역사이진 않을까 생각해.

 

우리민족 최악의 시련기를 우리 조상님들이 어떻게 버텨내고
견뎌냈는지를 아는 것은 그 분들 덕에 살아남은 후손들의 '의무'이기도 하고.

 

 

잡설이 길었노ㅋㅋ 시작한다ㅎ

 

 

 

 

1차 고려 vs 거란 전쟁

 

 

 

 

----프롤로그 : 만부교사건-----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내던 942년,
거란에서 30여 명의 사절단이 찾아왔어.

당시 중국의 연운16주을 차지해서 한창 기세등등하던 거란은
고려에게 앞으로 잘 지내 보자며 낙타 50마리에 예물도 가득 싣고 왔지.

 

외교사절단에게는 좋은 대우를 해주고 설령 전쟁중일지라도 웬만하면
사신은 죽이지 않는 게 국제관례였던데다 거란의 방문목적도
단순히 후삼국통일 축하와 친선관계성립이었기 때문에 보통은 고려측의
성대한 환영식과 답례품 교환이 뒤이어야 정상이었지만..

 

왕건은 다짜고짜 거란 사절단을 모조리 섬에 유배보내버리고
낙타 50마리는 개경의 '만부교'라는 다리 아래에 묶어 굶어죽여버렸어.-_-;;


이건 거란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지.

 


 
도대체 왜 왕건은 이런 강경한 행동을 취한 것일까?

 


이건 당시 왕건이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 유민들을 반드시 자기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어.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정복군주이지만 의외다 싶을 정도로 자체세력이
형편없이 약했어. 때문에 언 발에 오줌누기 식으로 '정략결혼'이란
카드를 남발해서 (부인이 29명;;) 어찌어찌 후삼국통일은 성공해냈지만,
발은 금세 더 꽁꽁 얼어버렸지.

 

왕건이 병신임을 알아챈 사돈집안들이 왕건이 살아있는데도 벌써부터
끼리끼리 세력을 규합해 자기 외손자들을 다음왕위로 올리려는 밑작업을 
벌일 정도였니까.

때문에 왕건에겐 외인구단인 발해유민세력이 노무노무 절실했던 거야.

 

 

이런 사정으로 왕건에겐 단순히 거란사신을 문전박대하는 정도로는 부족한  
뭔가 자극적이고 도발적인 쇼가 필요했던 거지.
(낙타는 사막동물이라 최소한의 물과 풀만으로도 며칠은 거뜬히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50마리나 되는 낙타가 다리 밑에서 내는 울음소리가
몇 주 동안이나 개성 전역에 울려 퍼졌어.
게다가 만부교는 지금의 서울역 광장 같은 곳이라 개성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지나는 다리였지. 만부교사건은 꽤 잔인한 정치쇼 였던 거야.)

 

 

 

 

 

 

이처럼 왕건이란 인물은 앞날을 내다보는 정치적 식견 자체가 아예 없었어.
당장 급하다고 '정략결혼'을 남발해서 결국 정국 불안정이라는 상황까지
가져와 놓고는 또 다시 당장 발해유민포섭이 급하다고 거란을
원수로 만들어버린 거지.

 

발해유민들이야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고려는
한창 욱일승천의 기세를 달리던 '거란'과의 전면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위험을
자처해버린거야.

 

 

 

이 게 고려와 거란의 시작이었지.


(만부교는 이 사건 이후로 '탁타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조선시대에 이 사건을 적은 비석도 세웠는데 둘 다 지금도 개성에 있다네.
비문은 명필 한석봉 글씨. 그리고 왕건이 이런 노망짓을 벌인 942년에 경기도 이천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어. 그 아이의 이름은 '서희'였지.)

 

 

 

 

 

------거란------

 

 

 

 


거란은 북만주지역에 오랫동안 살면서 고구려한테도 몇 번 까인 적이 있던
민족으로 유목민족들이 대개 그렇듯 평상시엔 목가적인 전원에서 한가로이 양에게 풀을 먹이며 조용조용 사는
사람들이었어.

 

그러다 만주벌판을 호령하던 고구려가 멸망하고 주인이 없어진 7세기경부터
8부족을 중심으로 연맹이 형성되고 3년마다 투표로 수장을 선출하는 정치체제를 갖는 등
조금씩 기지개를 피더니 9세기경 당나라가 부엉이바위 쪽으로 가면서 난세가 시작되자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지.

 

특히 거란의 '츄에리'라는 인물이 당나라군대를 연파하며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그는 곧 '아부치(약탈자)'라는 별명까지 얻게 됐는데
그가 바로 거란의 '야율아보기(아부치)'였지.

 

 

<야율아보기 기념상>

 

 

 

 

야율아보기는 당나라가 멸망하던 907년 8부족 위원회 중 한 명으로
선출되면서 거란의 중심세력중 하나가 되더니 916년엔 쿠데타를 일으켜
8부족장 전원을 암살하고 '텡글리칸(거란추장)'에 등극했어.

 

그리고 10년 후인 926년 전격적으로 발해를 기습 침공해 순식간에
운지시켜버리고 곧바로 서쪽으로 진출해 중원쪽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

 

그의 아들 야율덕광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16주를 장악해 마침내 중국 한족들을 지배하며 선진문화와 보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전쟁수행시스템까지 흡수하게 됐어.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성장이었지.

 

 

 

 

이제 중국의 천하는 크게 북쪽은 거란의 '요'나라. 남쪽은 한족의 '송'나라로
이분화되었는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국방력이 가장 약한 나라였던 만큼
거란에게 병신 취급을 받았고 거란의 ㅆㅅㅌㅊ 황제 '성종'은 송나라를 본격적으로 운지시켜버리기로 했어.
그리고 뒤치기 예방 차원에서 우선 '고려'부터 치기로 결정 했지.

 

 

 


------암운------

 

 

 

 


고려도 만부교사건 이 후로 거란을 가상 적국1호로 삼긴 했어.
허나 실질적인 대비는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지.
(그나마 천만다행인 건 만부교사건이 일어난 942년즈음 마침 중국에서

 '후진'이라는 나라가 거란에 대대적인 반기를 들면서 한바탕 전쟁이 터져서

만부교사건으로 곧바로 전쟁이 벌어지진 않았다는 거야.

게다가 곧바로 거란 내부의 권력투쟁이 심해지면서 한동안 외부에 신경 쓸 형편도 아니었고. 왕건 운빨 ㅅㅌㅊ?)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한 뒤 군인 숫자도 줄이고 세금도 감면해주고 전쟁노비도 풀어주는 등

자기 대에는 인심을 후하게 썼지만 말년에 만부교사건 한 방으로 엄청난 부담만 남기고는

곧바로 그 다음해에 노짱을 따라 가버렸고-_-

 

왕건이 남긴 또 하나의 유산(?)인 29명의 부인과 외척세력들로 인해 고려는 왕건이 죽자마자

피의 숙청과 쿠데타가 난무하는 일대혼란에 휩쌓여버렸지.
이게 얼마나 심각했냐면 심지어 고려는 통일하고 40년이나 지났을 때 까지도 아직 지방관도 파견을 못할 정도였어.
4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전국단위 행정망도 구축을 못한 거지.

능력이 없던 게 아니야. 국가체제 조직력이야 고구려-백제-신라-남북국시대를 거쳐오며

축적된 노하우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만큼 왕실 vs 호족세력들의 대립이 치열했던 거지.
(그러다 건국 47년만인 고려 성종2년(982년)에서야 처음으로 일단 12곳만 선정해서 지방관 파견하는데 성공ㅋ).


거기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당시 고려 정치인 누구도 거란과의 전면전에 대한

구체적인 플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거였어.

 

 

 


916년 발해가 운지한 뒤 발해국민이었던 말갈인들은 '여진'이란 이름으로 여전히
거란과 고려 사이에 낀 압록강 유역에 살고 있었어.


그러다 984년과 987년 거란의 성종이 고려침공을 위한 사전작업으로 여진족들을 공격해왔고

다급해진 여진족은 고려에 구원 요청을 했지. 근데 고려는 여진족과 합세해서
거란을 막기는 커녕 도리어 요시!!를 외치며 여진족의 통수를 쳤다가 도리어 병력의 2/3을 잃는 대패를 당한 거야-_-


뭐 국제관계란 냉혹한 거니 여진족을 친게 나쁜 건 아니지만 문제는 이 '다음'이 없었다는 거였어.
기왕 여진을 쳤으니 이 참에 거란과 동맹을 맺거나 관계개선을 할 수도 있을텐데 그 것도 아니었고
거란이 여진을 친다는 소식을 들은 송나라가 고려에게 '이 참에 송+고려+여진 연합으로 거란을 칩시다!!'라는
연합작전을 제안했지만 이 것도 거절했지. (그리고 무작정 혼자 여진 공격..)

 

암튼 고려의 이런 이상한 중립정책으로 다급해진 송나라는 결국 그 다음해(985년)에 혼자 거란을 쳤다가

대패를 당했고 이어서 여진족도 거란에게 굴복해버렸어.

 

 


이제 고려는 덩그러니 혼자 남아버리게 된 거야-_-

 

 

 

 

 

<당시 국제정세>

 

 

 


이제 고려는 거란을 혼자 맞서야 했고 거란은 결국 991년 압록강을 건너

지금의 의주지역에 성을 쌓아 한반도 진출의 교두보를 쌓았어.

그리고 2년 뒤인 993년 8월 거란의 성종은 드디어 '소손녕'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남하하라고 지시했지.


 

 

고려VS거란 전쟁의 서막이 오른 거야.

 

 

 

 

 

 


----1차 거란전쟁---

 

 

 

 

<중국측기록에 따르면 거란군은 말 위에서의 360도 방면 회전샷이 특기였다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로 쳐들어 오자 고려는 그제서야 부랴부랴 군사를 모았어.

사실 침공 3개월 전인 5월에 여진족들이 거란이 공격해 올 거라는 첩보도 알려줬는데도
'여진족들이 우리가 뭐가 이쁘다고 이런 정보를 주겠노?' 라며 믿지 않고 폐기처분했다가
진짜 쳐들어 오니까 그때서야 병사를 모집한 거지-_-

 

 

어쨌든 고려는 급한데로 박양유와 '서희', 최량을 보내 거란군을 맞서 싸우게 했는데
고려군은 '봉산'이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첫 전투에서 거란에게 보기좋게 민주화 당해버렸어.

 

아직 병사조차 제대로 모이지 않은 데다 시간벌기용으로 보낸 대항군마저 이렇게 허무하게
운지하자 고려조정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지. 

 


소손녕은 사신을 보내 "우리 군 80만임ㅋ" 이라며 항복을 요구했고 당시 고려 왕 '성종'은 ㄷㄷ떨면서

신하들과 대책회의를 열었어.
그리고 이 회의의 주제는 앞으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항복할까' 였지-_-
신하들은 무조건 항복하자 vs 염치가 없으니 평양을 포함한 황해도이북지역도 선물로 바치고
항복하자로 나뉘어서 서로 싸워댔어. 거란과 싸우자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지.(고려 조상님들 ㅍㅌㅊ?)
뭐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있는 군대 자체가 아예 없었던 거야.

 

게다가 '이지백'이란 놈은 그 와중에도 '연등회랑 팔관회'를 부활합시다!!라며 뜬금없이

전통문화를 복구하자는 헛소리까지 지껄였지-_-.

 
사실 고려 왕 성종이 왕건이 죽고난 후 부터 계속 되어 온 호족세력들과의 권력투쟁을

종결 짓기 위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고려의 국가체제를 정비했었거든.

거기에 불만을 품고 있던 호족세력들이 나라가 망할지 말지의
급박한 상황이 되자 요시!를 외치며 이지백을 내세워 개혁 중단하고 원상복구 하라고 왕을 협박한 거야ㅋㅋ
나라꼴이 개판이었지.

 


암튼 결국 "땅을 떼어주고 항복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고 고려 성종은 어차피 서경(평양)도 거란에게
줄 거니까 서경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이나 실 컷 나눠주고 그래도 남으면 그냥 대동강에다 다 갖다버리라는
비참한 명령까지 내렸어ㅉㅉ.

 

이 때 마침 북쪽에서 거란에게 발리고 뭔가 아리송해 하면서 돌아온 '서희'가 회의장에 나타났지.

 

그러고는 소손녕의 항복요구문서를 읽어 보더니 소손녕의 유우머에 부랄을 탁!치고 간다는 듯이 

성종에게 "잘하면 화친을 할 수 있겠습니다" 라며 일단 진정하고 고려 폐업기념 평양 창고대개방부터 취소하라고 했어.

 

 

<거란군 철갑기병>

 

 

 

 

거란군을 맞서러 가봤던 서희는 일단 '80만'이란 숫자가 허무맹랑한 뻥인 걸 단박에 눈치챘어.

게다가 거란군의 행보가 좀 이상했지.

 

거란은 8월에 압록강을 건넜는데도 두 달이 지난 10월까지
보통 2~3일이면 지나는 귀주-봉산지역까지만 진출하고는 거기서 멈춰있던 거야.

80만이면 하루치 식량만해도 얼만데 무려 두 달이나 아무 짓도 안하고 엑윽엑윽 거리며

한 군데에 죽치고 있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봉산에서 한 번 이기기는 했지만 아직 고려에게

 "장이요!"를 외칠 만한 결정적 승리를 거둔 것도 아닌데
벌써 두 번이나 항복요구문서를 보내며 "나 80만이거든? 그러니까 빨리 와서 항복해!!"라고

독촉을 하는 것도 이상했지.

서희는 젊었을 때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거란이 얼마나 잘 나가는 지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는데

이런 무시무시한 거란군이 싸움을 회피하는 듯한 행동을 하면서 애들 장난도 아니고 80만이라는

심해도 노무 심한 뻥을 치면서 빨리 항복하라고 문자만 보내고 있다는 건 역으로 얘네들이

그닥 정예군도 아니고 병력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싸움을 피하려고 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갖기 충분했던 거야.
 


서희는 이런 정황을 통해 거란이 고려를 정복하러 온 건 아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진 거야.

 

그리고 이는 정확한 저격(통찰)이었지.

 

 

 


 

사실 소손녕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어.

 

거란이 압록강유역에 교두보를 쌓았다고는 해도 이 건 말 그대로 '교두보'에 불과했고

그것도 고작 2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주변의 여진족들을 완전히 제압한 것도 아니었어.

984년과 987년의 두차례 여진 공습으로 여진족을 굴복시켰다곤 하지만

여진족 자체가 하나의 규합된 정치세력이었던 게 아니라
거란에 반감을 가진 여진족들도 적지 않았고.
(고려에게 거란의 침공을 알려준 여진족들도 있듯이)
 

소손녕은 지금 복수를 노리는 여진족들에게 둘러쌓인 채 고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던 거야.

 

이처럼 가뜩이나 70년 동안 교류도 없던 고려라는 미지의 세계 한 복판에서 적들에게 둘러쌓여 있는데다
만약 고려와 여진족이 연합이라도 맺게 된다면?

그리고 거란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송나라이고 고려침략은 그저 사전준비작업일 뿐인데
여기서 전쟁이 크게 번져버리면? 거란은 송나라 전선에 고려전선까지 전선이 두 개로 늘어나 버리기 때문에

부담이 노무노무 커질게 뻔했지. 거기다 고려는 너무 멀고 험했고.

(과거 ㅆㅅㅌㅊ 제국이었던 당나라도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신라까지 먹으려고 했지만 서쪽에서 티벳애들이 쳐들어오자
곧바로 대 신라전선을 포기하고 서쪽에 올인했었어. 덕분에 신라는 삼국통일을 완수 할 수 있었던 거지.)

 

 

이런 이유 때문에 소손녕은 병력이 80만이라고 허세를 부리며 (실제 병력은 10만도 훨씬 안됐을 것으로 추청)
고려에게 계속 항복 요구를 해온 거야.

 

 

만약 소손녕이 좀 더 신중해서 고려에 첩자를 보내 고려에는 군대라는 거 자체가 없었다는 걸 알았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소손녕이란 인물자체가 그닥 치밀한 편도 아니었고 겉으로는 큰소리 잘 치고 허세 잘 부리지만
사실은 소심하고 겁많은 성격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서희에게 저격을 당해버린 거지.

 

 

 

 

....허나 서희의 이런 저격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했고
지금은 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의 중대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희의 주장은 그다지 받아들여지지 않았어.

고려는 결국 '할지론(땅을 떼어주자)'쪽으로 기울고 있었지.

 


이런 양국의 복잡한 상황속에서, 결국 인내력이 부족했던 소손녕은 설마 고려가 지금
땅까지 바칠 준비를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고려의 항복을 재촉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실력행사에 나서기로 결정했어.

 


그리고 이 한 순간의 결정이 1차 고려vs거란 전쟁 뿐만 아니라 향 후 두 나라의 운명을 영원히 바꿔버렸지.

 

 

 

 

---안융진 전투---

 

 

 

당시 고려의 국경은 '청천강'이었어. 그나마 통일신라때는 '대동강'이었는데
태조왕건이 발해유민들을 중심으로 청천강까지 세력을 넓혀 평양도 접수해놨었지.

 

거란을 막기 위해 급한대로 올려보낸 대항군의 사령부는 청천강 중류에 있었고
청천강 하구에는 '안융진'이라는 방어요새가 있었어.

 

 

소손녕은 위에 설명한 이런저런 이유로 주력군을 움직이는 건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일부병력을 별동부대로 파견해서 이 안융진을 기습했지.

 

 

안융진은 고려군 사령부로 가는 도로를 통제하는 요충지였고 사령부와의 거리도 70리
정도밖에 안됐기 때문에 고려는 그야말로 혼비백산했어.

 

사령부가 안주에 있다는 건 고려군 주력은 안주보다 좀 더 전방에서 거란군 본진과
대치하고 있었다는 건데, 소손녕의 별동부대가 이 전선을 크게 우회해서 내려와
배후를 친 거지. 이는 심리적 압박감은 물론 고려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효과도 있기 때문에

만약 안융진이 함락된다면 그나마 딱 하나 있는 고려군마저도 무용지물이 되버릴 거였어.

 

 

절체절명의 위기였지.

 


 

 

<청천강이 당시 고려 국경선이고안북부가 당시 고려군 사령부가 있던 안주임>

 

 

 

 

안융진의 '진'은 군사거점에 붙이는 이름이야.

'진'은 규모에 따라 대-중-소로 나뉘는데 안융진은 중급정도로 그렇게
많은 수비대가 주둔하는 곳은 아니었지. 소손녕이 쳐들어 왔을 때는 아무래도
전시이고 사령부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하니까 이 보다는 병력이 크게 증원됐겠지만
요새의 규모자체는 그다지 크지 않았어.

물론 거란도 별동부대규모였으니까 그렇게 많지는 않았고.

 

 

 

근데 신의 한수일까, 이 안융진을 지키는 수비대의 구성이 굉장히 화려했어.

 

일단 당시 안융진의 수비대 책임자는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었는데
이 대도수는 934년 발해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귀순한 발해세자 대광현의 아들이었어.

 

거란만 아니었으면 발해의 왕족으로 어쩌면 발해왕까지 됐을지도 모를 인물이었지.

 

게다가 태조왕건이 호족세력들을 피해 발해유민을 기반으로 하는 왕실세력의 거점지를
새로 만드느라 평양을 포함한 청천강영역까지 북방개척을 했기 때문에 이 지역엔 발해유민 출신들이 많았거든.

 

다들 거란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지.

이처럼 한 때 만주를 호령했던 발해의 최고 지도자 집안이 이끄는 부대가 안융진에
포진하고 있었던 거야.

 

 

거기다 대광현의 부하인 낭장 유방도 ㅆㅅㅌㅊ 능력치를 가진 젊은이였어.

태조왕건을 도와 사실상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고려의 명장 유금필의 집안에서는
이 후에도 많은 무장을 배출했는데 이 유방도 같은 유씨였어.(실제 유금필 집안인지는 사료에 없음)

 

당시엔 성씨자체가 귀했기 때문에 유금필집안 출신일 가능성이 크지 .

 

이 우월한 유전자를 이어받은 유방은 안융진에 있을 당시엔 아직 젊은이였지만
이 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서 경호실장도 하고 무장임에도 예외적으로 '시중(정승)'까지
올라갈만큼 대단한 인물이었어.

 


고려군 사령부의 길목에 위치했던 요새 안융진엔 이렇게 사연많고 투지로 가득찬 수비대가 주둔해 있었던 거야.

 

그리고 이들은 소손녕의 거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끝에 이들을 물리치고 고려의 첫 승전보를 울리는
개가를 올렸지.

 

 

 

 

이 안융진전투는 스케일도 별로 크지 않고 거란군에 큰 타격을 준 전투는 아니어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상 이 전투가 1차 고려vs거란전쟁의 판도를 뒤엎었어.

 

 

이 소심한 우회기습이 저지되면서 소손녕은 더이상 군사작전을 펼 엄두를 내지 못했고
반대로 고려의 사기는 역운지했지. 고려정부도 이 소식을 듣자마자 할지론과 항복록은 쏙 들어가고
우선 '강화(화해)'카드를 써보는 걸로 돌아선 거야. 어쨌든 전적은 서로 1승1패니까 기싸움을 벌여봐도
될 거라는 희망이 생긴거지. 발해유민조상님들 활약 ㅅㅌㅊ?

 

 

 

안융진에서 이기자마자 고려는 이런 희망을 품고 얼른 '장영'이라는 사신을 보냈어.
근데 소손녕은 격 떨어지니까 더 직급높은 놈을 보내라고 진상을 피며 내쫓아버렸지.

 

고려 성종은 직급높은 대신들에게 누가 자원하겠냐고 물었지만 살기등등한 소손녕의 겁주기에 바짝 쫄은
대신들은 아무도 응답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봤어.

소손녕의 겁주기가 효과를 보고 있던 거지.

 

 

이때 드디어 슈퍼스타 서희가 자원을 했고 감동한 고려 성종은 예성강까지 서희를 배웅하며
손을 꼭 붙잡고 위로까지 해줬어. 그만큼 고려는 절박했던 거야.

 


 

 

 

---서희---

 


위에 썼듯 서희는 942년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났어.

공교롭게도 태조왕건이 만부교에서 거란 낙타들을 굶겨죽이던 그 해에 태어났지.

 

서희 집안은 경기도 이천의 호족출신인데 이천은 삼국시대부터 서울 경기->충청->전라/경상 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한 곳으로, 태조왕건이 이 길로 후백제를 치러 남하할 때

서희의 할아버지 '서목'이 길을 안내해서 무사히 강을 건너게 도와줬다고 해.

이천이란 지명도 이섭대천(무사히 큰 강을 건너다)에서 따온 거라고 하네.

 

암튼 이런 공을 세워 왕건의 눈에는 들었지만 고려초기는 역시 개성이 있는 황해도일대와

신라의 중심지 경주일대 출신들이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서희집안은 그다지 영향력이 있진 않았어.

 

그래서 서희의 아버지 '서필'도 하급관리부터 시작했지. 근데 이 서필이란 인물도 ㅆㅅㅌㅊ라
자기 능력만으로 재상까지 올라갔고 살아생전에도 '대쪽같은' 성품으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해.

 

태조왕건의 셋째아들이자 네번째 왕인 고려 '광종'은 무시무시한 사람이었는데
호족과 왕실간의 싸움을 극한으로 몰아붙여 조금이라도 세력이 강한 호족들은 무참히
살육해버린 왕이었어. 말년에는 자기 맏아들인 세자까지도 의심해서 세자는 늘 방구석에 틀어박혀
벌벌 떨어야 했지.(이 때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나중에 정신이 오락가락해져서 금방 죽어)

 

 

광종은 고려 호족세력들을 제압하기 위해 '중국인출신'을 적극적으로 유입했고
중국의 선진문물도 수용해서 우리역사 최초로 '과거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는데
이 과거제도도 당시 중국 후주에서 많은 개혁을 성공시킨 '쌍기'라는 중국관리가
도입시킨 거야.

 

 

암튼 이렇게 중국인출신들을 기용하면서 광종은 성격답게 토착호족들의 집과 땅을 그냥 뺏어서
중국인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을 자주 썼고 호족들은 ㅆㅂㅆㅂ 거리면서도 죽을까봐
전전긍긍만 하고 있었어.

 

 

이 때 서희의 아버지 서필이 나섰지.

어느날 서필이 광종에게 찾아가 자기 집과 전답을 모두 바치겠다고 했고
광종은 뜬금없이 왜 그러냐고 물었어. 그러자 서필은 대놓고 "어차피 쫌 있으면 내 껏도 뺏어갈테니
뺏길바에야 그냥 내가 내놓을래요" 라고 말해버린거야.

 

말한마디에 끌려나가 도륙당하던 시기에 정말 목숨을 내놓은 직언이었지.

광종은 크게 노했지만 서필을 죽이진 않았어(아마 서희의 집안이 좀 더 힘있는 가문이었다면
서필도 이 때 죽고 서희도 같이 죽거나 노비로 팔려나갔겠지)

대신 그 후에도 계속 호족들 집을 뺏어서 중국인들에게 나눠주는 식으로 삐딱선을 계속 타긴 했지만
서희의 아버지 서필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사건이지.

 

 

암튼 서희는 이런 아버지를 닮았는지 어려서부터 명석하고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었어.

 

열아홉에 과거를 급제한 ㅆㅅㅌㅊ 서희는 31살이 되던 해에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됐는데
서희가 맡은 임무는 "단절된 송나라와의 국교를 회복하라"였지.

 

당시 송나라 황제는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이었는데 처음엔 찾아온 고려사신들을
문전박대했지만 나중엔 서희의 논리정연한 말솜씨와 예의바른 태도에 탄복하면서 벼슬까지
내렸을 정도였어(물론 명예직ㅋ)

 


그리고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바로 이 서희가 목숨을 걸고 거란 진영으로 가겠노라고 자원을 한 거야.

 

이제 고려의 운명은 이 서희의 세치 혀에 달려있었지.

 

 

 

 

 

---바보병신소손녕찡---

 

 

 

 


위에서 상술했듯 소손녕의 고려침공 목적은 어디까지나 송나라를 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어. 게다가 빠른 기동작전과 교차투입으로 적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어
민주화시키는 전략을 즐겨쓰던 거란군에게 사방이 좁고 울퉁불퉁한 고려지형은 상극이었지.

 

거기에 안융진전투에서의 패배로 사방에서 여진족들도 ㅄ ㅄ 거리며 곱지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
소손녕은 빨리 고려와 강화를 체결하고 돌아가고 싶었던 거야.

 

 

이 때 드디어 서희가 찾아왔지.

 

 

소손녕은 우선 즐겨쓰는 방법인 "겁주기" 부터 시전했어.

숙소 앞의 마당에서 서희가 인사를 하자 대뜸 "꿇어" 라고 한 거지.

사방엔 무시무시한 거란군호위대가 칼을 들고 서 있었기 때문에
고려사신일행은 다들 벌벌 떨었지만, 서희는 쫄지 않았어.

 

서희는 소손녕에게 "사신은 그 나라의 대표이기 때문에 오직 황제 앞에서만
무릎을 꿇을 수 있음. 너도 신하고 나도 신하인데 내가 너한테 무릎을 왜 꿇음?"
이라며 버텼지. 소손녕은 엄청 화난 척 하며 노발대발 했지만 서희는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버텼고 결국 소손녕이 물러서면서 회담이 시작됐어.

 

1회전인 기싸움은 서희의 승이었지.

 

 

 

먼저 진짜 고구려계승국가가 어디인가 부터 걸고 넘어졌다가
서희에게 역으로 한 방맞아 2회전에서도 민주화당한 소손녕은

이 거 보통 놈이 아니구나 싶었는지 곧바로 자신의 진심을 꺼내 보였어.

 

"니네 왜 우리랑은 친하게 안지냄?" 이었지.

 

[고구려흑역사]시리즈를 본 게이들이라면 잘 알겠지만 북방유목민들이
중원으로 쳐들어가기 위해선 언제나 동방에 있던 우리 조상님들이 신경쓰였어.

때문에 우리조상님들을 발라버리든지 친하게 지내든지 관계정리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지.

 

 

거란 성종대에는 이미 거란이 중원에 진출한 지 오래 됐고 최우선대상은 어디까지나 송나라였기 때문에

굳이 고려를 힘으로 제압하기 보단 화친을 맺어서 관계정상화를 시키는 편을 택했던 거야.

 

소손녕이 압록강을 건넌 이유가 바로 이거 였지.

 

 

소손녕의 이 한마디에 자신이 줄곧 품고 있던 의문이 확신으로 바뀐 서희는

"우리가 몇 번이나 가려고 했는데 여진족들이 길막해서 못갔던 거다. '강동6주'만 먹었어도 너네랑
사신교환도 자주 하고 잘 지냈을텐데.."

 

라는 역사적인 한 마디를 던졌고 순진멍청한 소손녕은 이 걸 덥썩 받아물었어.

 

 

 


---강동 6주 ---

 

 

 

 

 


강동6주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지역으로 산세가 굉장히 험한 곳이야. 
이런 이유로 고구려가 수도 평양을 지키는 2차방어선을 깔아놓은 곳이기도 했지.

산세가 노무노무 험해서 이 지역을 지나는 길도 딱 두 갈래 밖에 없었는데
이 길목마다에 위치한 곳들이 바로 강동 6주였던 거야.

 

당나라의 고구려 침입을 봐도 알 수 있듯 일단 이 압록강변의 2차방어선을 뚫으면 평양까진
직선도로였고 개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비록 태조왕건의 청천강 수복으로

평양이 고려영토로 들어오긴 했지만 고려는 이 압록강변의 강동6주가 없는 한은

여전히 안심할 수가 없었지.

그리고 이런 문제가 소손녕의 침공으로 여지없이 현실로 드러난 거고.
 

 

강동 6주가 가진 전략적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소손녕은
만부교 사건등으로 지금까지 고려가 거란을 적대적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거란이 싫어서가 아니라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도
길막때문에 못왔던 거라는 한마디에 노무노무 기쁜 나머지 그만 부랄을 탁!치며 긴장을 풀어버렸어;;
소손녕도 이런 오지에서 벌벌 떠는 지겨운 생활을 빨리 접고 싶었지.

 


소손녕은 곧바로 거란 성종에게 회담 내용을 보냈고
이런 상황을 알 턱이 없던 성종도 어쨌든 고려와의 관계개선이라는 목적은 달성했으니
돌아오라고 했어. 덧붙여 고려의 압록강변(강동6주) 개척에도 동의를 해줬고.

 


바보병신소손녕찡은 자기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 지 끝까지 알지 못했어.
군대다운 군대도 없던 고려를 정복하거나 무장해제 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철통같은 대 거란 방어벽을 쌓도록 허락해준 걸로도 모자라
홀가분한 마음에 동맹 기념으로 서희에게 낙타 10마리 말 100마리 양 1천마리에
비단 5백필이라는 수백억대 재산까지 선물로 남겨두고 간 거야ㅋㅋ

 

 


이 서희와 소손녕의 행보를 보면 진짜 사람을 잘 쓰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 것 같다ㅋ

 

 

 
어쨌든 이로 인해 고려는 건국한지 80년만에 문닫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강동 6주 방어선까지 확립하는 데 성공했지.

 

천국과 지옥의 교차가 바로 이런 건가 싶을 정도의 결말이었어.

 

 

 

 

 


---에필로그---

 

 

 

 

누구보다도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던 서희는 망설이지 않았어.

 

소손녕이 돌아가자마자 994년 서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유역까지 영토를 넓혔지.

 

서희는 이 지역을 접수하자마자 곧바로 요새화 작업에 들어갔는데,
994~995년까지 불과 2년만에 강동6주 곳곳에 무려 29개나 되는 성과 요새를 쌓았어.

 

지금처럼 중장비도 없던 시절에 산세도 험한 지역에 이런 엄청난 대공사를 일으킨 건
보통 일이 아니었어. 게다가 기간도 2년이라는 초단기 기간에 끝내버린거야.

 

 

서희는 이번에는 다행히 소손녕이 병신일게이마냥 헤헤 거리며 돌아갔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거란이 곧 다시 쳐들어 올 것이고 그 때는 이 번 같은 운은 없을 거라는 걸
예측했던 거지.

 

 

수만명의 백성들을 2년내내 쉴새없이 동원한 탓에 백성들과 부하장교들의 불만도 많았지만
서희는 가카못지 않은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이 모두를 성공해냈어.

 

 

 

모두가 우왕좌왕하며 혼돈에 빠져있던 상황 속에서 오직 혼자 흔들리지 않고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봤고
홀로 기적을 일으켜내었으며 다가올 대전란의 시대까지 정확히 예견한 서희는

마치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다 완수 했다는 듯 강동6주 요새화 작업이 끝나자마자 쓰러졌고
결국 3년동안의 투병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어. 향년 56세였지.

 

 

 

이 후 서희의 예견대로 30여년 동안 거란은 끊임없이 고려를 쳐들어왔어.
그리고 그 때마다 이 강동6주 방어선은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지.

 

만약 서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소용돌이 쳤겠지.

 

 

 

역사를 훑다보면 가끔 '역사적 사명'을 띄고 나타난 듯한 신기한 인물들이 있어.

광개토대왕이 그렇고, 이순신장군이 그렇고, 박정희갓카가 그렇지.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 서희야 말로 위에 열거한 구국의 영웅들에 못지 않은 위대한 인물이지 않을까 싶어.

 

드라마틱하게도 태조왕건이 만부교사건을 일으킨 해에 태어나서, 강동6주방어선을 손수 책임지고
확립하자마자 쓰러져 죽은 그의 일생은 호사가들의 구미를 당기기에도 충분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많은 역사책도 그렇고 세간에는 서희가 단지 '세치 혀'만 잘 굴려서
말빨로 공을 세운 인물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 게 노무 안타까워.

 

그래서 우리 게이들만이라도 우리 역사에 '서희'라는 대단한 조상님도 있었다는 걸
알았으면 해서 삼일이나 걸려서 길게 썼다ㅋㅋ

 

 

 

 

 

 

---------------------------------------------------------------------------

 


일단 고려 vs 거란 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영웅들도 노무노무 많고 할 이야기도 많아서
시리즈로 쓸 생각인데 시간 날 때 틈틈이 쓰는 거라 빨리 올리지는 못할 것 같다.
 
대신 분량을 최대한 많이 쓰니 그 걸로 이해해 주기 바란다ㅋ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