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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1562(명종 17)∼1622(광해군 14))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곤양정씨의 시조이다. 초명은 무수. 자는 경운, 호는 매헌으로 곤양출신이며 증좌찬성 정호의 아들이다.

 

1580년(선조 13) 고성에서 향시에 합격하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왕명에 따라 기룡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신립의 휘하에 들어가고 다음해 훈련원봉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으로 승진하여 경상우도방어사 조경의 휘하에서 종군하면서 방어의 계책을 말하고, 거창싸움에서 왜군 500여명을 격파하고, 김산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였고, 곤양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았다.

 

이어 유병별장이 되고, 상주목사 김해의 요청으로 상주판관이 되어 왜군과 대치, 격전 끝에 물리치고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에 승진되고, 이듬해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왜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이어 성주·합천·초계·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절충장군으로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경주·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하여 용양위부호군이 되고, 이듬해 다시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경상도방어사가 되어 다시 침입하여올지 모르는 왜군에 대처하였고, 다음해 김해부사·밀양부사·중도방어사를 역임하였다.

 

그뒤 용양위부호군 겸 오위도총부총관·경상좌도병마절도사 겸 울산부사가 되었다.

 

1610년(광해군 2) 상호군에 승진하고, 그뒤 보국숭록대부로서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의 직을 맡다가 1622년 통영 진중에서 죽었다. 상주 충렬사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충의이다.

 

 

 

1줄 요약 : 60전 60승 700병력으로 왜군 구천 썰고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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