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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베를 간 짤이다. 천배를 넘겼다는건 많은 게이들이 공감을 했다는 것이겠지?

 

그러나 과연 한반도의 역사에만 반복되는 현상일까? 난 국뽕주의자가 아니며 국뽕을 링겔로 쳐맞은 우리 교과서(전 과목) 저술입장에는 구역질이나는 사람이지만

 

지나치게 우리자신을 깎아내리며 자학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여기 박정희와 이순신처럼,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고도 '입'만 가진 선동세력들에 의해 ㅁㅈㅎ당한 두 명의 비운의 영웅을 소개한다.

 

둘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같은 무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둘 모두 그 시대 그 세계의 패권을 잡았(었)다.

 

그들은 바로 카르타고의 '한니발' 과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다.

 

 

왼쪽이 푸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스피키오, 오른쪽이 한니발 바르카스 

 

 한니발은 대대로 카르타고의 무장집안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하밀 카르는 1차 포에니전쟁에서 활약한 역전의 용장으로 한니발이 18세때 사망한다.

 

반드시 로마를 패망시키라는 유언을 한니발에게 남기면서 .......   이후 한니발은 에스파냐 지방에서 힘을 키운다.

 

 

그리고 매형 하스드루발이 죽자 후임으로 에스파냐 총독에 오른다. 이 때 그의 나의 26세로 정식취임한 것이지만 사실은 부친 사후부터 에스파냐의 실질통치자였다.

 

그는 1년만에 에브로강 이남의 거의 에스파냐 전역을 휩쓸었다. 당시 에스파냐는 그야말로 미개한 원주민들이 들끓고 있었다 갈리아인보다 미개했음.

 

한니발의 에스파냐에서의 활약은 자기 가문인 바르카 가문에 뿐 아니라, 조국 카르타고에도 큰 득이 되는 것이었는데,

 

이 지역의 식민지 경영으로 이루어진 광산 개발 등의 경제적 활동은 카르타고의 지상군사력 강화와 본국의 지리적 장점을 이용한 해양교역에 날개를 달아주었지.   

 

그런데 기존의 주 산업이었던 북아프리카일대 곡창지대에서의 농업활동으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들은 큰 불만을 품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한논'이다. 이 작자는 대지주로서 자신의 기존 입지가 흔들릴 만한 세력이 성장할 기미를 보이자 한니발을 모략한다.

 

'자신의 성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자, 로마를 자극하여 우리에게 재앙을 초래할 인물'등으로 한니발을 모함하지만 식민지 확장으로 이득을 본 자들이 더 많았기에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과 바르카 가문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러나 한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카르타고의 확장과 그 선봉에 선 바르카스 가문의 한니발을 흠집낸다. '로마를 자극하여 전쟁을 초래할 것'이라는 명분으로 .....

 

생각해보면 해양세력으로서 카르타고의 팽창은 불가피한 것임에도 한논은 상황파악을 못함. 로마를 꺾을 생각을 안 하고 무작정 충돌만을 두려워했지.

 

외부로 나가지 말고 북아프리카에 쳐박혀서 잘 먹고 잘 살자 이기야. 그럼 대농장을 소유한 자신이 계속 카르타고 최고권세를 잡을 수 있으니까

 

결국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2차 포에니 전쟁에서 16년간의 이탈리아 원정동안 한니발은 본국으로부터 두 차례의 지원밖에 받질 못한다.

 

본국에선 모했노 이기야! 카르타고 원로라고 그드럭거리고 말았단이야깁니까! 자기들이 직무유기 아닙니까?

 

에스파냐에서 출발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를 16년 동안 벌벌 떨게 했던 한니발과 거꾸로 에스파냐를 제압하고 아프리카 자마에서 전쟁을 끝낸 스피키오

 

이들이 싸운 제 2차 포에니전쟁, 소위 한니발 전쟁에 대해서는 일베에도 많은 정보글이 있고 다들 잘 알고 있을테니 자세한 서술을 생략할게  

 

 

 

 다만 그 중에서 한니발의 활약이 카르타고에 얼마나 큰 이득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알게해주는 에피소드를 한 토막 소개한다.

 

그 유명한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은 5천 5백의 희생자 만으로 7만이 넘는 로마군을 전사시킴으로써 말 그대로 분쇄시켜버린다.

 

당시 성인로마 남성들은 민사나 행정업무에 쓰이는 자신의 도장을 금반지로 끼고 다녔다.

 

전쟁에 종군해서는 한국군의 군번줄마냥 신분을 나타내주기도했는데 칸나에전에서 몰살당한 로마군의 시체와 전리품을 꼬박 이틀간 수습한 한니발은

 

막내동생 마고네편에 본국 카르타고로 수송한다. 카르타고 원로원에 이름까지 새겨진(도장이니까 당연히) 

 

이 묵직한 금반지 수만개를 쌓자 그 높이가 천장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도 앞서도 언급했듯이 한니발은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 많은 황금으로 gomma 떡 사먹고 말았단 얘깁니까?

 

칸나에 전투가 알프스를 넘은지 1년만에 치뤄진 전쟁인데도 이후 15년간 직무유기한 카르타고 본국 ㅍㅌㅊ?

 

그렇다면 한니발은 어떻게 오랜 원정을 감행했을까? 이탈리아 남부지방 거의 전역을 차지하고 있던 시기엔 물자조달에 문제가 없었겠지만

 

전쟁말기 반도 끄트머리로 쫓겨난 산악지대인 칼라브리아 지방은 오늘날에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이다.

 

그런데도 4천명의 병사가 로마군의 공격을 받고 투항한 적이 딱 한 번 있을 뿐, 한니발을 배신하고 떠난 병사는 한 사람도, 말 그대로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니발이 이끌고 있던 군대는 아프리카인과 에스파냐인과 갈리아인 등 서로 말조차 통하지 않는 병사들이 뒤섞인 혼성군이었다.

 

게다가 전쟁 말기에는 병사들에게 급료를 지불하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시민병으로서 병역을 의무를 이행하는 로마군과 달리 한니발의 병사들은 모두

  

용병이었다. 용병이라면 급료도 주지 못하는 사령관 따위는 버리는 것이 당연했다.

 

붙임성있고 개방적이어서 적까지도 그를 만나면 반해 버렸다는 스키피오와는 반대로 (선거에서 출마 연령 미달이었지만 당선될 정도),

 

한니발은 일게이들마냥 히키코모리였다. 그래서 사적인 일화나 에피소드가 하나도 남아있질 않다고 한다. 이런 한니발에게 어떤 매력이 있었던 걸까?

 

한니발 군대에 종군하며 기록을 남긴 실레노스의 자료를 읽어본 리비우스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추위도 더위도 그는 묵묵히 견뎌냈다. 병사들이 먹는 것과 같은 식사조차도, 시간이 되었으니까 먹는 게 아니라 배고픔을 느끼면 먹었다. 잠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는 잠시도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그런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항상 우선했다.

그런 한니발에게는 밤낮의 구별도 없었다. 잠도 휴식도, 포근한 침대와 조용함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병사용 망토만 두른 채 나무그늘에 그냥 드러누워 잠을 자는 한니발의 모습은 병사들에게는 익숙한 광경이 되어 있었다.

그 옆을 지날 때면 병사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

 

kia~ 이런 사람을 상관으로 모실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큰 행운일거다.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대장을 어찌 배반할수 있으랴?

 

그러나 다들 알고 있겠지만 한니발이 이탈리아에 갇혀 있을때 최소 40이 되어야 임명될 수 있는 집정관에 30세의 나이로 임명된 스키피오가 에스파냐를 정복한후

 

아프리카로 한니발을 끌어내서 '자마'에서 격파함으로써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이어진 강화협약에서도 한니발은 조국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는데 로마가 제안한 훌륭한 강화조건을 한논을 위시한 강경파들이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개소리를 해댔기 때문이다. 확실한 비전 없이 딴사람이 하는 일에는 큰 소리로 비난하는 대표적인 '비판을 위한 비판'이 판을 쳤던것.

 

결국 한논의 대표적 꼬붕 '시스코네'가 원로원에서 발언하던 도중 한니발은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고 연단에서 끌어내려 버린다.

 

시스코네는 스키피오와 두 번 싸워 두 번 모두 패배한데다가 자마 전투에는 참전하지도 않은 자이니 평생을 전장에 바친 한니발이 얼마나 빡쳤을까?

 

"나는 아홉 살 때 모국을 떠난 뒤 오늘날까지 36년 동안 전쟁터에서 인생을 보냈습니다. 전쟁터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시 생활을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탁상공론을 농하는 게 아니라, 강화를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스키피오의 제안은 우리나라의 현재

실정을 생각하면 타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라고 한니발이 발언하자 결국 강화가 성립되었다. 대안없이 비판만하는 좌파새끼들은 그럴듯해도 결국 똥은 우파들이 치우걸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거다.

 

전쟁이 끝난 뒤 역전의 용장, 희대의 천재전략가 한니발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서 잠깐 반도국의 역사를 돌아보면,

 

충무공 이순신은 7년간의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장렬히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을 자살이라는 ssul을 기정사실화 한다면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는 死후에도 끊임없이 능욕당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정묘재란의 진압 논공행상에서 1등공신에 봉해진 직렬 중  가장 많은수를 차지하는 것은 놀랍게도 선조를 지근거리에서 수행원들이었다.

 

선조가 탄 가마를 메거나, 말고삐를 잡고 있었다거나, 피난 도중에 따뜻한 세숫물을 구해온 것들이 1등공신의 책봉사유였고 많은수의 내시들이 1등공신에 봉해졌다.

 

그 다음이 문신, 가장 적은 수를 무장이 차지했다. 그 숫자는 단 세명, 그것도 처음엔 권율과 이순신 둘 뿐이었지만 이순신을 견제하고자 했던 선조가

 

"이순신이 1등공신이라면 원균도 1등공신이다."며 깽판을 치자 막판에 억지로 원균이 추가되어 억지로 세 명이 된것이다.

 

이런 마당에 충무공이 살아있었다면 그는 한 목숨은 물론 멸문지화를 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덜 슨조들을 너무 탓하지는 말자. 북아프리카 튀니지의 슨조들인 카르타고 역시 놀랍도록 같은 전철을 밟는다.

 

강화 6 년째 되던 해에 카르타고 원로원은 '한니발'을 무려 로마에 고발한다. 적국 시리아와 내통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슨상님도 울고갈 통수 ㅅㅌㅊ?

 

본국 로마에선 요시! 하며 조사시찰단이 파견되고, 한니발은 굴욕을 피하기 위해 망명길에 나선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배신한 조국에는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중동을 떠돌며 反로마 연합의 구축을 꾀했지만 '지중해를 우덜의 호수로 만들자'는 기치아래 로마의 세력이 중동까지 뻗쳐오자 쓸쓸히 독약을 마셨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아! 나의 조국 카르타고여! 로마를 부수지 못한 나를 용서해다오!" 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용서를 빌어야 할 쪽은 오히려 카르타고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한니발을 전술을 배워 한니발을 운지시키고 아프리카를 정복한 자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는 조국 로마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다음 편에 쓴다. 분량은 조또 없구만 힘들어 뒤지겠다. 사실 저 앞의 일베글 본날부터 준비해서 여기까지 썼다. 간보는거 아니니 욕하진 말자.

 

 

출처 : 로마인 이야기2 : 한니발 전쟁

 

 

 

 

이미지 출처 : http://blog.naver.com/beetle55?Redirect=Log&logNo=100188545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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