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 설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이승만(李承晩) VS 한국독립당 김구(金九)
(사실 이 선거는 후보가 이승만 밖에 없다고 해야 맞지만, 경쟁 대상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므로 김구까지 넣었다. 자세한 것은 선거양상에서.)
<선거 배경>
1945년,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한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이미 조선 독립을 언급하였으며,
이후 연합국의 승리가 기정사실화 된 1945년 7월 26일에는 포츠담 선언을 통해 조선의 독립을 재확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을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에, 이에 대한 논의가 필수적이었다.
이 필요에 따라 일어난 것이 모스크바 삼상회의이다. 삼상회의는 삼국 외무장관1)들이 모인 회의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 해당 삼국은 미국ㆍ영국ㆍ소련이다.
이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구체적인 조선의 독립 방안을 비롯한 각종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한 회의였으며 다음과 같은 사항이 결정되었다.
1.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설치한다.
2. 미국ㆍ영국ㆍ소련ㆍ중국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최대 5년 기한으로 실시한다.
3. 이하 사항을 이행하기 위하여 미국ㆍ소련 공동위원회를 구성한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동아일보에서 아직 삼상회의 결과가 나오지 않았음에도 '미국은 즉시 독립,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이라는 오보를 내고 만 것이다.
이로 인해 국내 여론은 들끓게 되어 소련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한편, 신탁통치에 대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개시되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신탁통치의 실시 여부가 아니라 임시정부 설치 문제였다.
신탁통치는 한반도 임시정부를 통해 조절될 여지가 다분했으며 기한을 축소하거나 아예 실시하지 않게끔 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여론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좌파는 민족정부를 먼저 수립함이 옳다고 주장하는 한편, 우파는 신탁통치는 제 2의 식민지배라며 규탄했다.
좌우 대립이 날로 격화되는 한편,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를 이행하기 위해 설치된 미ㆍ소 공동위원회도 한 차례 결렬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은 전북 정읍에서 "민족정부 수립을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므로 남방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한다." 는 정읍 발언을 발표한다.2)
2) 이 정읍 발언이 남북 분단의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다. http://www.ilbe.com/4422075095
이대로 가다간 정말 민족이 분열될 것이라는 우려 하에, 여운형이 좌우합작위원회를 꾸려 대립을 종식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박헌영이나 이승만, 김구 등 영향력 있는 정치인 그 누구도 이에 참여하려 들지 않아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설상가상으로 중도파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던 여운형이 암살당함으로써, 중도파는 완전히 와해되고 좌우합작위원회 역시 해체된다.
이와 별개로 그리스와 터키 등에서 소련과 대결 구도가 성립되면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이에 따라 한 차례 결렬되었던 미ㆍ소 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고, 무기 휴회 상태에 돌입함에 따라 미국은 이 문제를 UN 총회로 넘긴다.
UN에서는 한반도에 UN임시한국위원단을 파견하여 한반도 전역에 인구 비례의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였으나,
북한 지역보다 남한 지역의 인구가 약 2배 가량 많으므로 가장 불리해질 것은 자신이라고 판단한 소련이 북한으로 하여금 입국을 막는다.
이에 따라 문제는 UN총회에서 다시 UN소총회로 이관,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 즉 남한 단독 총선거를 결정한다.
이에 따라 구성된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 의석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계열에 해당하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민주당 등이 87석을 차지했으며, 무소속이 103석을 차지했다.
이는 아직 정당 정치가 발달하기 이전으로써 정당 보다는 인물 개개인에 대한 지지율이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이승만은 그 지지율 역시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1945년 해방 직후 선구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운형에 이어 지지율 2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총선거가 있기 1년 전인 1947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이 사실상 1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좌우지간, 이러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제헌 국회는 내각 책임제를 지지하였으나 국회의장 이승만이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민국은 대통령 중심, 4년 중임제로 결정되었으며 국회에서 간접 선거의 방식으로 선출하기로 결정됬다.
간접 선거란 국민들이 직접 대통령을 뽑는 직접 선거의 반대 개념으로써,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 경우, 과반 수에 가까운 78석의 의석을 보유하고 있는 이승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된다.
<선거 양상>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 기반이었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지지 여당 한국민주당의 지지에 힘입어 91.8% 의 득표율로 당선된다.
하지만 초대 대통령 선거에는 후보가 이승만 밖에 없었다. 김구와 안재홍은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불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구를 지지한 13표와 안재홍의 2표는 무엇인가?
초대 대통령 선거는 후보가 출마하지 않아도 국회의원들이 투표를 하면 득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승만이 유일했고, 이승만이 당선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락 요인>
당선 요인
1. 해방 직후, 보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맞아떨어지는 이승만을 지지했다.
2.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집정관총재3) 를 맡아 행정 경험이 많고, 뛰어날 것이라는 정치인들의 기대가 작용하였다.
3) 국가 원수에 해당하는 직책인데, 집정관총재라는 정식 명칭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직책을 대통령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3.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로 활동했으며, 반탁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큰 인지도와 지지율을 보유하고 있었다.
4. 경쟁 후보가 존재하지 않았다. <선거 양상> 부분에서 설명했듯이 본 선거에는 이승만을 제외한 이렇다 할 후보가 없었다.
3줄 요약
1. 국내의 격렬한 좌우 대립과 한반도 독립 방안을 협의한 열강 간의 갈등으로 한반도는 분단된다.
2. 이로 인해 남한 단독 총선거를 치루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이승만 계열 정당이 78석을 차지했다.
3. 대통령 선거는 간접선거로 진행되었으며 이승만을 제외한 이렇다 할 후보가 없었기 때문에 수월히 당선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