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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역사


#1

 

살인은 가장 기본적인 범죄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현상이며 시간과 지역에 따라서 변하기도 한다.


초기의 살인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 사이의 투쟁의 결과였으며,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그렇게 살인은 태초에 인간성의 순수하고 본래적인 부분이었다.

 

그런 순수한 살인의 시대는 오랜 시간이 흐르며 지나갔다.

 

비옥한 토지는 인간의 수에 비해서 적었고, 인간은 황무지를 피해 서로 뭉치며 공동체를 형성했다.

 

그렇게 최초의 인간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에 반해서 비옥한 토지에 초대받지 못한 자들은 그 안에 들어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미 공동체는 포화되어있는 상태, 초대받지 못한 자들은 한가지 선택밖에 남지 않았다. 바로 약탈자 또는 침략자가 되는 것.


인간이 다른 생물에 비해서 뛰어난 지능을 가진 것에 대한 이론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 중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학설을 제기한다.

 

최고의 효율과 최적의 방법으로 빠르게 살인하기 위해서 도구를 사용하며 인간의 지능이 발달했다고 말한다.


과거의 실상, 그리고 실제로 도구에 대한 최초의 목적이 어떠하든,

 

인간이 자신의 부족함을 메꾸기 위해서 도구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변치않는다.

 

그리고 그 부족함 중에서는 살인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는 것 또한... 변치 않는다.


그렇게 살인은 인간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며, 지금까지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동체를 통제하기 위해서 인간은 살인을 금기시 했다.

 

살인은 양자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었지만,

 

공동체적으로 볼 때 이러한 비논리적이고 공동체간의 분열을 유발하는 방법은 별로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에 대해서 제도적으로 살인을 금기시 했지만, 여전히 근현대에 와서도 원시적인 살인은 자주 일어났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일원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엄연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버트 아즈베리의 뉴욕의 갱에 대한 저서에도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올드 브르아리의 지하실, 그곳은 20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곳의 전성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없이 약 1천명의 인구가 존재했다.

 

이들은 모두 빈민들이었고, 교육과 복지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원초적이고 인간 태초의 본성에 좌우받는 이들은 현대 도덕에서 동떨어진 존재들이었다.

 

종족간의 혼교, 난교, 근친상간은 모두 당연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도덕적 이성이 존재치 않는 자들은 물론 직업이 있을리가 만무했다.

 

남자들은 도둑, 살인자, 그리고 소매치기가 대부분이었으며, 여자들은 매춘을 하며 먹고 살았다.

 

외부를 통한 문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냐고 반문하겠지만,

 

이러한 조그만한 곳에서 1천명이 빽빽하게 무리지어 사는 곳에 '최소한의 볼품있는 옷을 걸친' 일반인들이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뜻했다.


그렇게 올드 브르아리의 지하실은 인간의 사회 안에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격리된 또 다른 세계로 존재했다.

 

 

 

이러한 예를 보듯이, 인간이 공동체에 대한 최소한의 규칙을 교육받지 못했을 때의 행동은 근현대에 와서도 변하지 않는다.


반대로, 시간과 불변하게 인간이 어떠한 이념으로 도덕적 순리를 거스를 수도 있다.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의 시작은 한 이상한 예언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이름은 피에르였고, 은자라고 불렸다.

 

그가 최초로 나타난 곳은 독일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잔인한 행태를 설파했다.


보통적인 사람이라면 종교적 이념에 앞서 그러한 위험천만하고 알 수 없는 여행에 동참하지 않겠지만,

 

당시의 북유럽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수많은 야만족의 횡포로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토지는 비옥하지 못했고, 그 크기조차도 매우 적었다.

 

때문에 북유럽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부들은 잃을 것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의 이념-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예루살롐을 탈환한다는-, 을 변명으로 삼아 유럽 각지를 떠돌았다.

 

그리고 변명거리를 가진 인간집단이 얼마나 잔인해 질 수 있는지를 몸소 증명했다.

 

 

 

그들이 헝가리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같은 기독교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두 집단간의 언어체계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비옥한 토지, 많은 재물, 그리고 아리따운 여자들을 보고

 

십자군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따르면 그러한) 이교도들로부터 성전을 선포했다.

 

결과적으로 피에르의 십자군 원정대는 수 많은 기독교적 영토에 횡포를 부리고 진압당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인간이 분명히 그 인간적 성격을, 다시 말해 하나에 이념에 따라서 움직이는 능력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념과 달리 그들이 한 최초의 행동은 우호적인 외국인에게 횡포를 부리며 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념이 실제로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이 이념과 다른 행동을 한 것은 맞다.

 

그 이유는 바로 욕망이다. 이념으로 변명거리를 삼자 그들의 욕망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2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살인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원초적이고 합리적인 수단이다.

 

그러나 공동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이러한 살인은 공동체의 존립에 큰 문제를 야기한다.

 

또한 인간 각 개체들은 하나의 이념으로 뭉칠 수 있으며, 욕망에 따라서 이념과는 다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이 때 이념은 존재치 않는 것이 아니라, 왜곡되어 인간의 원초적이고 금기시 되는 욕망을 드러내게하는 변명이자 기폭제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단 하나이다.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가... 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단순하다.

 

더 많이, 그리고 최소한 남들보다는 적어도 많이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긍정적인 것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이러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살인을 하는 자들은 공동체에 있어서 큰 문제이다.

 

공동체는 이러한 살인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편으로 교육이 생긴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옛날에는 어떻게 살인을 방지했을까?

 

 

 

 

 

공동체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번째로는 외부의 적들에 대한 방법이다.

 

애초에 욕망을 위해서 살인을 하는 자들은 교육받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과는 '존재적으로' 다른 존재들이다.

 

보통적이라면 가족끼리 욕망을 위해서 살인하겠는가? 아니다.

 

그들이 공동체를 습격해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을 하는 이유는 서로 간이 철저히 독립 된 외부인이자 상식이 통하지 않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공동체의 기반, 즉 비옥한 토지를 빼앗기게 된다. 피할 수 없다.

 

남은 것은 약탈자들을 몰아내는 것 뿐, 바로 자체적인 방위조직이다.

 

 

 

 

두 번째로는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범죄에 대한 예방이었다.

 

이미 범죄를 저지른 자는 공동체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재차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 처형당했다.

 

그러나 이렇게 대부분의 범죄에 처형을 도입하자 범죄자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작은 빵 하나에도 목숨을 잃을 것이라면, 차라리 죽이고 범죄 사실을 숨기는 것이 낫다.

 

작은 빵 하나보다는 고기 한 덩어리가 잡혀 죽기 전에 좀 더 나은 양식이 될 것이다.

 

그렇게 공동체가 범죄에 대해서 강력한 조치를 취하자, 범죄자들은 좀 더 대담해지고 잔인하게 바뀌었다.

 

 

이렇게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처형제도가 역으로 강력범죄를 유발하자,

 

통치자들은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범죄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바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다면 어떠한 결과를 맛보게 되는지, 얼마나 비참한 꼴이 되어 자신의 범죄를 후회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통치자들은 단순히 목을 메달거나 자르며 처형하는 것이 아닌,

 

좀 더 관객들을 위해서 앞으로의 범죄자가 될 씨앗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고통스럽고 잔혹한 처형방식을 도입했다.

 

 

고대 영국에서는 빵 하나만을 훔쳤을 뿐에 불구하고,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의 처참한 방식으로 처벌했다.

 

죽기 직전까지 목을 메달아 조르고, 몸에서 튀어나온 것들(성기, 귀 코, 혀 등)을 자르고 사지를 토막낸 뒤 죽이는 방식까지 도입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대의 범죄자들은, 그들이 받을 처형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좀 더 가까이 있는 것들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바로 생존이었다.

오늘 먹을 빵이 없으면 내일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잔인한 처형방식에 대한 위험을 받아들이고 범죄를 저질렀다.

 

반대로 공동체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동체 또한 그들의 사회를 지켜내고 싶었기 때문에,

 

재차 범지를 저지르지 않을 법이 없는 범죄자들을 갱생시키기보다도 차라리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서 처형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러한 사회상은 20세기에 와서도 계속되었다.

 

서로가 조금씩 동정한다면 분명히 공동체의 행복이 양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2000년전에 예수가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직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위험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물론 현재에 와서 대부분의 현대화 된 공동체 사회는 양적으로 풍요롭기 때문에,

 

과거의 예수가 주창한  '없는 자들을 위한' 베풀음을 최소한의 정책으로 남겨두었다.

 

바로 복지이다.

 

어찌되었건 과거에는 현재에 당연시되는 것들,

 

서로간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최소한의 도덕과,  공동체 근원적으로 자리잡은 복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인간은 내부에 자리잡은 욕망을 통제하기 힘들어했으며, 공동체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과거에 얼마나 많은 처형이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지만,

 

헨리 8세가 왕위에 있던 37년 동안에는 7만 2천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처형된 자들이 저지른 범죄의 경중이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 또한 알 수가 없다.

 

 

근현대에 와서 1966년 미국의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경찰서의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모든 종류의 범죄는 합이 약 3만 3천건이었다.

 

이 중에서 6천 건이 안되는 범죄가 경찰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만약 헨리 8세 당시였다면 이들 모두가 처형되었을 것이다.

 


헨리 8세 당시의 영국의 인구는 약 4백만 명,

 

1966년 클리블랜드의 인구는 1.5배인 약 600만 명이다.

 

 

그렇다고 본다면 헨리 8세 당시의 1년 범죄 건수는 약 2000건이다.

 

클리블랜드의 1년 범죄 건수가 3만 3천건이었던거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치이다.


여기서 우리는 헨리 8세 당시에는 범죄 발생률이 현대와 비교해서 매우 적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현대의 범죄 원인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소외 현상이 당시의 영국에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날도, 대부분의 공동체가 맞닿아 있는 영국 시골등에서는 중대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통계를 기반으로한 결론에서 알 수 있듯이, 범죄의 원인은 그닥 문명의 발전도와는 관계가 없다는 점이다.

 

 

#3

우리는 이제 범죄는 처벌방식과는 연관이 없다는 점을 배웠다.

 

또한 1966년 클리블랜드에서의 범죄 건수 통계와, 헨리 8세 당시의 기록의 차이에서 범죄는 서로 간의 불식이 큰 원인을 담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상호간의 면식과 관계없이 생존을 위한 범죄는 문명의 발전도를 무시하고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생존을 위한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서 각 공동체는 최소한의 복지를 베푼다는 것이다.


 

이 장의 마지막으로 다룰 주제는 '인간은 범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다.

 

인간은 매우 양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한 때는 어머니와 같이 자애롭다가도, 돌연 변해 굶주린 맹수와 같이 잔인해진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은 과거부터도 증명이 되었다.

 

그러면 인간 개체의 성향이 이토록 양면적이고 그들이 교육받은 '도덕'에 관계없이 범죄를 저지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어떻게 공동체를 이루었는지에 대한 문제가 남아있다.

 

사실 현대에까지도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성향, 즉 잔인성은 사회 구조의 일부로 인정된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도덕적으로 지탄 받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러면 각 사이트에서는 그 행위에 당사자에게 어마어마한 지탄을 쏟아낸다.

 

 

다른 예를 들면, 매일 뉴스에서 떠들어대는 왕따 문제가 있다.

 

한 학급에서 약간 부족하고 표적이 되는 학생에 대한 무조건적이며 비논리적인 가혹행위를 말한다.

 


이렇듯이 잔인성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지만 불행히도) 사회 구조로 엄연히 자리잡혀있다.

 

그건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권력, 부를 가진 자들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자들에게 거의 동정하지 않았다.

 

이건 현재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사회 대부분의 부는 일부에게 편중되어 있다.

 

오늘 먹을 양식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이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진 자들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지 않는다.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정부가 최소한의 복지를 명목으로 세금을 걷지 않는 이상,

 

그러한 소수가 가진 대부분의 부는 그들에게 치중되어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이 갈리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것만은 확실하다.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손수 내어놓는 행위는

 

과거에 비해서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고등하게 교육받는 현재에 와서도

 

그 빈도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는 못하지만) 고등한 교육을 받아도 잔인성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 과거에는 어떠한 방식의 잔인성이 존재했는지를 알아보자.

 

사회적으로 경멸받는 자들(현대에는 동성애자, 패션좌파가 있다)은 지탄의 대상이 되어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유태인들, 이교도등은 사회에 방해가 된다고 간주되는 자들은 끔찍한 모멸감을 가지며 살았다.

 


그리고 각 장원을 통치하는 영주는 신부의 첫날밤의 권리를 갖는 초야권을 행사했고, 대부분은 이에 만족했다.


인간이 잔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배가 부르다면 선을 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그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변태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사람은 엄연히 존재하기 마련이다.

 

 

 

몇몇에 의한 그러한 감정에 충실한 행위들은 현대에 와서

 

 사회의 불평등과 구성원 간의 불신을 조장하는 갑질문화나,

 

앞으로 다룰 살인 그 자체를 위한 살인이 있다.

 

 

과거에도 이러한 것들, 즉 일반인들에게 혐오감과 두려움을 느끼게하며 이해가 불가능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존재했다.

 

 

 

 

18세기 초로 돌아가서,

 

당시에는 가정비극이란 새로운 유형의 극이 출연하며 대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가정비극은 경찰의 보고서를 토대로 실제 범죄를 무대에 재현하는 것이다.


이 것은 실제 범죄와는 차별되는 것이지만,

 

가정비극으로 부터 우리는 인간의 본연에 자리잡은 변태적인 성향과 이러한 감정에 매료되며 사회 전반으로 나오는 비이성적인 행태를 알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가정비극은 호러 영화, 공포 소설 등이 있다.


이러한 매체를 접하는 자들은 물론 그 개체의 사회적 성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물론 몇몇은 이에 매료되어 실제로 유사범죄를 저지르지만, 대부분은 그 자체로 만족한다.

 

또한 이러한 매체를 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성향 그 자체가 변태적인 매체를 접할 때 우리는 범죄와 자신을 동일시 하며 일종의 공포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는 악몽에서 벗어나 다행으로 여기며 만족한다.

 

공포 소설을 읽다가 멈추지 못해서 죽는 사람이 없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매체를 접할 때 언제든지 중단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실제 범죄를 재현하는 가정비극이 과거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가에 대한 이유는 단 하나가 남는다.

 

바로 인간 본연에 내재된 변태적 성향을 외부인의 입장으로서 채우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의 대중에 비해서 과거의 대중들은 흡사하지만,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그들은 소박했다는 점이다.

 

오늘같이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기사들이 난무하는 현대에 비해서,

 

그 때 당시에는 스스로의 욕구를 외부로부터 충족시키는 것은 매우 요원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구성원은 노동자들이었고, 그들은 성적인 것들에 대해서 크게 결핍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러한 사실에 주목한 작가들은 이에 맞춰서 가공의 창작물을 현실의 사건을 기반으로 쏟아내었다.

 

 

 

예를 들면, <화바샴의 아덴>이라고 불리는 가정비극이 있다.

 

이것은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으로 토머스 아덴과 그의 부인 앨리스 노스, 그리고 그녀의 정부 토머스 모스비가 극 중 인물로 나오는 작품이다.


토머스 아덴은 성적 욕구보다는 돈을 좀 더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부유한 가문의 딸인 앨리스 노스와 결혼한다.

 

불행히도, 앨리스 노스는 남편인 아덴과 다르게 성적 욕구가 매우 크고 이를 실현시키기에 충분한 행동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녀는 토머스 모스비라는 재단사와 내연의 관계가 되었다.

 


남편 아덴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지만, 부인을 (아마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불륜을 눈감아 주었다.

 

그리고 부인의 성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타인(모스비)가 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부인 앨리스가 이러한 남편의 마음을 알았으면 좋았겠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는 남편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범죄를 맡은 자는 내연남인 모스비였다.

 


모스비는 처음에는 직접 죽이려고 시도했지만,

 

내연녀의 남편 아덴이 그를 섹스에만 몰두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매우 지쳐있었다.

 

스스로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고된 섹스로 인해 체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살인청부업자에게 아덴의 살해를 의뢰한다.

 


몇 번의 멍청한 시도 끝에, 결국 아덴은 죽고만다.

 

당시에 남편을 살해한다는 것은 엄청난 중죄였고, 거의 반역에 해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단순히 범죄와는 무관하게 가해자들과 사적관계로 연결되었을 뿐인 모든 무고한 이들도 처형당했다.


그리고 한 극작가에 의해 새롭게 각색되어 <화바샴의 아덴>이란 작품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과 비교해 보았을 때, 충실하게 재현 된 것은 아니다.

 

실제 아덴은 없는 자들에게는 잔혹한 수전노였고, 이를 토대로 보았을 때 아덴은 결코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그는 완벽하게 선역으로 탈바꿈되어 욕망에 사로잡힌 악역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과연 작품이 실제 사건에 완벽하고 충실하게 재연했다면 이 작품에 매료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답은 '아니다'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의 잔혹함과는 다르게 있는 집의 여인이 얼마나 성적으로 타락했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적인 결핍이 엄청났고 이를 충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욕에 굶주린 여인과 비교되게 아덴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화바샴의 아덴>의 결말은 여인이 죄를 뉘우치며 회개한 뒤 화형당하며 끝이나는 것이다.

 

 

만약 오늘 날에 이 사건을 토대로 새롭게 작품을 짠다면,

 

아덴을 포함해서 모든 이들이 변태적인 성향에 결핍되어 이를 나름의 방법으로 충족하는 자들로 나올 것이다.

 

모든 작품들은 사회의 욕구를 표현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구성원 모두가 변태 성욕자로 표현되는 현대에 비해서  마지막에는 회개하며 끝나는 과거가 좀 더 도덕적인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위 사례와 여러가지 사실들을 검토해 볼 때,

 

우리는 과연 이렇게 인간 각자가 말 그대로 합칠 수 없는 쓰레기인데 어떻게 공동체를 이룰까에 대한 의문이 최종적으로 남는다.

 

공동체를 이끄는 것은 몇몇의 가진 자들에 의한 강제적이고 무조건적인 정책을 통해서 존재하며,

 

시대에 따른 발전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행히도 이 모든 앞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인간은 스스로 공동체를 이룰만큼 통념적인 관점에서 도덕적이고 착한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의 본연의 습성인 잔인함,

 

그 원초적 속성을 사회 전반으로 퍼트리는 한 사건이 벌어진다.

 

 

출처

https://han.gl/eks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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