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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사실일수도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일 것 같습니다.

 

 

 

 

 

 

 

 

 

 

1945년 일본의 항복 

 

서울시장님 닮은 히로히토왕의 최근 모습

 

1945년 일본 히로히토왕은 라디오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소,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그러나 조선인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천황이 난데없이 개소리를 씨부리는것을 보며 코딱지를 후비면서 듣긴 들으라고 하니까 일단 라디오를 시청하고 있었다.

사실 일본천황의 저 말은 포츠담선언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었다.

(대략 포츠담선언의 내용은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을 선사한다.)

그렇게 1945년 8월 15일 조선의 광복은 조용했다.

 

다음날 아침 조선 팔도는 흥분에 휩싸였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외신과 국내 일부 지식인들의 소문을 통해 깨달은 것이다.

거리로 뛰쳐나와 일본놈들이 이제 사라질 것이란 것에 대해 너도나도 만세를 불렀다.

이미 해외의 일부 지식인들은 세계 정세를 대충 보고 일본이 조만간 병신이 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만주에서는 김일성의 조선독립동맹이,

중국에서는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선국내에서는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을 호시탐탐(?)노리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항복한 바로 그날 은밀히 여운형과 접촉하여 협상을 맺었다. 일본인들이 안전하게 조선을 빠져나갈수 있도록 도와야 하며, 대신 일본은 조선의 행정권을 전적으로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넘긴다는 내용이었다.(권력이양이라 보면 된다)

 

(당시 조선 내 인기 짱 아이돌 여운형)

 

여운형은 당시에 공산주의사상이 반 민족주의 사상이 반이 섞이고 하느님을 믿는 개독으로서(공산주의와 종교는 양립할수가 없다.) 비교적 온건한 독립투사였는데,  이러한 사실 때문에 일본은 그나마 덜 살인적인 여운형과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이 당시 중국에서는 김구(=칼구)가, 만주에서 김일성이 일본인들의 목을 따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때였다.

여운형은 조선총독부의 제안을 수락하고, 조선에서 실질적인 힘을 넘겨받고 이씨조선과 일제가 사라진 주인없는 조선땅을 다시 정비했다.(광복에 흥분한 조선폭도들을 제압, 일본인토지와 재산을 조선인에게 다시 분배 등)

대충 여운형이 제시한 협상내용은 이렇다.

1. 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 석방

2. 서울내의 3개월식량분 확보

3. 치안유지 및 건국관련 정치활동 간섭금지

4. 학생, 청년들을 조직하고 훈련하는데 간섭금지

5. 노동자 농민을 건국준비에 동원하는데 간섭금지

8월15일날 이것이 협상되고 8월 16일날 1번이 시행되어 갑자기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석방되자 그제서야 조선인들은 15일날 천황의 라디오발표가 항복선언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혼란스러운 광복이후

일본이 떠나고 난 조선은 주인없는 땅이 되었다. 수많은 정당과 단체가 난립하여 권력을 잡기위해 힘썼다.

대표적으로 몇개만 알아보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좌파 여운형, 민족주의자 안재홍이 합작) => 조선총독부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우파 김구) => 민족주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한민당(우파 송진우) => 세력확장을 위해 친일파들을 포섭하였으며, 지지기반이 매우 취약했으며,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조상이다.

조선공산당(좌파 박헌영) => 남조선내 대표 빨갱이

특히 한민당은 사실상 대한민국 국내 최초의 정당이다. 자본가와 지주 등등이 모인 대표적인 우익정당으로 출발했다. 당시 조선의 지주등은 친일파가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친일파들과 연계가 많이 되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있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대차게 깠으며, 일본인들에게 무차별 괴롭힘을 선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조차 깠다.

1945년 9월 미국과 소련의 조선진출

소련은 이미 8월달에 일본에 전쟁선포를 하고, 거침없이 싸다구를 날리며 조선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오키나와를 막 점령하고 전쟁을 끝내려고 할때였는데, 소련이 거침없이 조선으로 내려오자 불안감이 들었다.

일본이 "반자이!" 외치며 자살특공대까지 사용하며 미국에 반격하자 전쟁이 길어질 것을 우려한 미국은 소련에게 일본전 참여를 유도하게 되고, 소련이 이를 수락했는데, 소련이 까고 보니까 일본은 개 병신 상태인 것이었다.

일본이 점령한 조선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역시 점령해야 정상인데 지금 소련이 조선을 삼키려고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력을 빼서 한국을 쳐들어가기엔 본토와 거리가 멀었다. 소련의 거침없는 남하를 보며 미국은 불안했다.(고생은 미국이 다하고 소련이 냠냠) 이대로가면 소련이 한반도를 다 쳐먹게 생겼다.

미국은 소련에게 제안을 서둘러 38선을 긋고 소련의 질주를 저지했다. 소련역시 흔쾌히 수락한다.(동유럽에 세력확장을 위해) 그리고 미국은 일본을 완전 삼킨뒤에 조선에 느긋하게 당도하게 된다.

 

 

(빨갱이 출입금지)

 

곧 미국이 조선에 들어올 것이란 사실을 안 여운형은 서둘러서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새로 있으니 안와도 된다는 나름 소심한 주장이었지만, 미국은 코딱지를 후비면서 들어오고 조선의 미 군정외에 어떤것도 인정하지 않는 다고 엄포를 놓았다.

여운형이 선포한 조선인민공화국은 그대로 사라지고,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도 부정되어 김구 역시 개인자격으로 조선땅을 밟았다.

이때 일본의 조선총독부 역시 조선의 행정권을 여운형이 아닌 미군에 넘겨주게 된다.(애초에 일본은 미국에 망했다)

 

그리고 옛 조선총독부 건물엔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걸리게 된다.

 

 

 

 

 

 

38선 북쪽에서도 소련이 조만식-김일성을 앞세워 북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미국과 소련의 통치 방침이 다르게 되는데, 다음에 서술할 비극들의 시발점이 된다.

신탁통치 좌우대립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린다. 대략 내용은 조선을 어떻게 해야 하냐에 대한 논의인데,

소련 : 신탁통치 반대, 미국 : 신탁통치 찬성 이건 개나소나 초딩도 아는 내용이겠다.

 

그럼 왜 이런 주장이 왔는지 보자.

 

소련은 공산당 일당전제를 통해 북조선의 행정을 담당했다. 따라서 북조선에서는 지주, 자본가, 종교인(조선반도 북쪽은 원래 전통 기독교세력)등등 많은 세력이 축출되었으며, 공산당만이 남게 되었다.

미국은 자유주의의 나라답게 그 어떤 정당도 허용하고 중립을 지킨다고 선포했다. 조선 이남은 수많은 정당 단체가 난립하여 혼돈 오브 카오스인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소련은 신탁통치를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결집력이 강한 공산당이 정권을 잡으면 조선은 소련것이었다. 그래서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미국은 신탁통치가 필요했다. 자유주의를 기조로 하긴 했으나 미국은 조선을 먹고 싶었다. 그러나 조선에 수많은 단체가 있는데 어느 단체가 공산주의자들인지, 미국 편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조선의 지식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신탁통치를 통해 최대한 미국이 붙잡아두고 친미파들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안그러면 고스란히 조선은 소련에게 넘어가는것은 자명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생긴다.

1945년 매일신보는 모스크바3상회의의 신탁통치 내용을 전하며, 이 당시엔 우파 좌파 가릴것 없이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30몇년간 일본에게 나라를 뺏긴채 살아왔는데, 이제 조선이 다시 생겼는데 미국과 소련이 다시 통치한다하니(물론 일제시대와 경우는 다르다) 조선반도가 하나가 되어 반대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2월 동아일보가 엄청난 사건을 터트린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찬성하고, 미국이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는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일부 좌파계열 신문사를 제외하곤 모든 언론이 이 기사를 인용하여 대대적으로 조선곳곳에 퍼진다.

1945년 12월 27일자 기사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다.

완벽한 개씹오보 기레기급 기사였다.

조선반도는 헬지옥에 휩싸였다.

 

신탁통치 찬반논란. 거의 전쟁수준을 방불케 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반대를 내세우며, 소련 빨갱이새끼들이 조선을 삼킨다고 비난했다.

 

이당시 대표적인 공식 빨갱이 박헌영은 엄청난 혼란에 휩싸였다. 분명 소련은 반탁인데, 조선인민들은 소련이 찬탁을 주장한다고 알고 있던 것이었다. 처음에 반탁을 주장하던 박헌영은 아무리봐도 뭔가 이상해 직접 소련으로 건너가 진실을 듣는다.

 

그러나 여기서 소련은 입장을 갑자기 반탁에서 찬탁으로 바꾼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더라도 찬탁하는 단체를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만들면 조선의 공산당들이 유리하다"라는 이론이었다.

즉 미국이 찬탁을 하고 있으므로, 결국 신탁통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찬탁을 해서 차라리 미국쪽에 잠시 붙어 임시정부수립에 들어가라는 것이었다. 그럼 이후 조선은 공산당들에게 넘어간다. 이것이 소련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박헌영은 조선으로 돌아가 조선의 빨갱이들에게 소련의 입장을 전하고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찬탁을 주장한다.

 

 

물론 일반 백성들은 신탁통치가 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조선을 미국이나 소련이 대신 통치한다는 것은 대충 알수 있었다. 그들은 일제시대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반도의 여론은 절대적으로 반탁이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찬탁이었지만, 개개인으로는 반탁을 주장하며 조선인민들의 미움을 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반탁을 주장하던 이승만과 김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조선에서 정치입지를 넓히기 위해 이승만은 반탁을 주장했으며, 일제시대부터 폭력적으로 유명한 김구도 "탁치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내걸으며 임시정부가 조선인민들의 여론에 힘입어 미군정을 탈취하고 조선을 되찾자라는 일종의 쿠테타까지 시도한다. 12월 30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포고령을 내리고, 반탁을 위한 총파업에 돌입하게 되는데 결국 무위로 끝난다.

그 기간동안 미국은 조선의 이러한 사정을 전해듣고, 우익계열의 송진우를 따로 불러 격렬하게 진행되는 반탁을 좀 누그러 뜨리라는 임무를 내린다. 송진우는 이를 이행하기 위해 연설등을 통해 조선인민들에게 호소하나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오히려 찬탁을 하자는 연설한 그날 새벽 송진우는 암살당한다.(김구추종자들의 일이라는 것이 썰. 그만큼 신탁통치에 대한 거부감이 엄청났다고 보면 된다)

 

송진우 OUT!! 송진우 OUT!!

 

 

그러나 이러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반탁운동을 보며 총파업까지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본 우파일부계열들은 찬탁은 어쩔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찬탁으로 돌아선다. 대표적으로 김규식. 물론 김규식 암살단이 조직되고 김규식은 이를 피해다닌다.

박헌영, 여운형등 찬탁 공산주의자들 역시 암살시도가 여러번 있었다.

이 모든 암살시도가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자들이라는 썰이다.

 

우리 조선을 나누려는 새끼들은 아군 적군이고 할 거 없이 다 쳐죽일껴. (feat.김구)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조선반도내에서의 들끓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를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2차례 열린다. 물론 미국과 소련은 결국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소련은 2차 공동위원회에서 입장을 살짝 바꿔 물론 반탁은 했어도 나중에 반대를 안하겠다는 서약을 하면 그 단체들을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해주겠다는 방안을 미국에 제시한다. 그것이 공동서명5호이다.

처음에 김구는 여기에 서명을 하지 않았으나, 결국 김규식등의 설득으로 서명하고,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이승만도 이에 서명한다. 반탁의 주요인사들이 다 서명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소련이 이것에 의의를 제기한다. 김구와 이승만은 극렬 신탁통치 반대론자였는데 그 서명이 과연 진정성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이 둘은 극렬반공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임정에 참여하면 조선내 공산화에 큰 걸림돌이었다.

결국 이로 인해 미소공동위원회는 전부 파토난다.

 

이에 미국은 UN소총위에 한반도를 넘기게 된다.

미국이 지배하는 UN

UN은 2차세계대전이후 창설된 세계기구이다. 미영프소중. 이 2차대전의 전승국가가 실질적인 상임국으로써 UN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당시로 돌아가보면 사실상 UN은 미국이 지배하는 기구였다.

 

 

2차대전이 끝나고 영국 프랑스는 전후국가로써 미국의 마셜플랜으로 무제한 원조를 받는 국가였다. 중국은 이 당시 중국은 장개석의 중화민국이었다. 이 역시 미국편이었다. (우리가 아는 현재의 중국은 마오쩌둥의 공산국으로서 70년대에 이르러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을 대신 받는다.)

즉 당시의 UN의 상임이사국 5개 국가 중 4개의 국가가 미국의 따까리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은 이를 이용하여 코리아의 국회와 정부수립 문제를 UN으로 넘겼다. 당연히 소련은 큰 불만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이대로가면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되기때문이다.

예상대로 UN위원회에서 12찬성,2반대로 한국의 문제가 총회로 넘겨졌다. 총회 역시 41찬성,6기권,7반대로 정치위원회에 넘겼다. 이제 한반도의 문제는 UN이 관리하는 것이다.

소련은 이에 거부하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1.소련군과 미군의 전면철수 2.외세의 개입없이 한국인들끼리 정부 구성 을 주장하며 반격했다. UN의 개입을 차단하가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미국은 당연히 코웃음을 쳤다.

대신 미국은 UN정치위원회에 1.UN이 한반도위원단을 구성하고, 2. 위원단 참관아래 남북한 총선거실시 및 정부수립 3. 해당 정부가 국가창설. 4. 이후 협정에 따라 미소양군 철수를 제안했고 소련은 당연히 여기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여기서 총선거를 제시하면서 국회의원 숫자를 몇명을 놓느냐에 대해 미국은 인구비례로 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남한은 북한의 2배 인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국회의원숫자역시 남한측이 2배를 가져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와중에 여기서 4번을 보자. 미소양군이 철수하는 조항이다. 이 조항때문에 소련과 미국은 군대를 한반도 에서 전부 철수했다. 비록 소련은 수많은 군수품들을 남겨둔채로, 미국은 모조리 싸그리 빼버린 것이 달랐을뿐이다. 이것이 바로 625전쟁의 주요원인이 되었다.>

소련은 물론 이에 반대하며 소련의 제안을 다시 내놓았으나, UN은 소련을 거부하고결국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당연히 UN이 조선으로 들어와 선거를 실시하려 하자 소련은 북쪽으로는 넘어오지 말라며 거부했고, UN은 선거가 가능한 남한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의 논의가 길어짐에 따라 이승만은 "그냥 씨발 남쪽에서나 투표 합시다."라는 정읍발언을 하고, 김구는 이에 "씨발 남과 북은 하나여. 지랄마:"라며 맞받아치는 과정이 있다.

 

특히 시간이 흐를수록 이승만의 발언이 현실화될것을 우려한 김구는 김규식과 함께 북쪽으로 넘어가 당시 북쪽빨갱이들의 수장 김두봉, 김일성과 남북협상을 진행했으나 실패하였다.

 

남북협상하러 가는 김일성과 김구.

 

 

사실 애초부터 말이 안되는 협상이었다. 왜냐면 이미 김일성은 소련의 지령으로 북쪽에서 정부를 단독으로 꾸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이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을 이용해 북한이 조선의 정부임을 선전하는 데 이용하게 된다. 즉 들러리만 되었다.

 

김구가 인정한 공식 흑역사이다.

 

 

그리고 결국 예정대로 남한내에서의 총선거가 진행되었다. 김구를 비롯한 여러 지도자들은 해당 선거를 거부하며 출마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들이 출마를 안함으로써 어부지리로 다른 후보자들이 대거 국회에 당선되는 게이득을 누렸다.

니들 없어도 된당께?

 

 

1948년 8월 15일 전세계에 대한민국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UN으로부터 한반도 내 정식 정부로서 승인을 받았다.

 

이윽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역시 수립이 선포되었다.

 

 

 

 

 

남북한은 이후 현재까지 계속 분단된채로 남아있다.

 

 

출처

https://han.gl/QrEO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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