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yser-i Rûm
Mehmed the Conqueror(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
반갑다 일게이들아 나는 동유럽사와 초원 유목민사를 좋아하는 일게이인데 여기도 그쪽으로 관심이 있는 게이들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대부분은 역사시간에 존나 간략하게 예니체리제도며 밀레트제도 티마르제같이 오스만제국의 대표적인 제도들만 배우고 오스만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로 만든 술탄들의 업적들은 다들 생소할것같아
기존에도 물론 술탄들을 다룬 정보글들이 있긴한데 대부분 술탄들의 업적을 너무 간략하게 적어놔서 개인적으로 좀 길고 자세하게 써볼까해
일단 메메드2세 이전의 오스만을 이야기해볼게
위의 사진은 1281년과 1326년의 오스만의 강역이야 오스만제국의 설립자인 오스만1세는 매우 뛰어난 행정가이자 지도자로써 당시
아나톨리아에서 동로마제국의 영향력의 약화와 몽골의 아나톨리아 진출로 약화된 주변 튀리크계 부족들사이에서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어 오스만1세는 이슬람판 십자군이라고 할수있는 가지(Gazi Warrior)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고 극심한 혼란기속에서 생겨난
난민들과 부랑민들을 수용함으로서 나라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야
호랑이의 자식이 개새끼일수 없듯이 오스만을 계승한 오르한은 존나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형제인 알레딘과 제국을 다스리고 있을때
알레딘은 오르한에게 예니체리의 설립을 조언했고 이 조언은 받아들여져 이때 그 유명한 예니체리가 처음 만들어지는 거지
아버지가 그러했든 오르한도 가지의 지도자로써 주변부로 신속하게 확장하였고 그가 통치했던 40년간 제국은 설립기의 3배이상의
강역을 획득하게돼
오르한의 유지는 무라트 1세가 이어받는다 무라트1세는 오르한이 만든 제국을 두배로 들려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종속국으로
만들었지 무라트1세는 발칸에서의 제국의 영향력을 충분히 확보하고 안드리아노플을 에디르네로 개칭 향후 100년간 제국의 수도로
삼았어 뿐만아니라 아나톨리아의 여러 튀리크계 국가를 상대로도 강역을 늘렸어 참고로 무라트1세의 코소보 전투는 1차 코소보전투로
잘 알려진 코소보전투는 제2차 코소보전투야
이렇게 100년동안 아나톨리아와 발칸에서 강국으로 성장한 오스만은 바예지드1세의 통치기에 최대의 시련을 맞이해..
다름아닌 티무르의 공격으로 말이야.
티무르는 세계의 전략가들중에서 top10 으로 넣어도 모자람이 없었던 위대한 영웅들중 한명이야 티무르는 1399년까지 카프카스,시리아
맘루크를 공격해서 정복하고 아나톨리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어 이당시 바예지드는 헝가리에 원정중이였는데 동쪽에서 티무르가
약탈을 시작했다는 급보를 받고 급하게 회군을 결정해
그리고 오스만제국과 티무르제국은 앙카라에서 회전을 벌이게되는데 양군 총합이 15만을 웃도는 거대한 회전이였어 결과적으로
바예지드는 티무르에게 사로잡히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해.. 바예지드는 앙카라전투가 있었던 1402년으로부터 1년후인 1403년에
사망하게되 참고로 오스만 술탄중 최초로 백마섹돌를 가졌던 인물이야
바예지드가 사망할때 딱히 후계자가 없었던 까닭에 존나 혼란기가 도래하지
참고로 이슬람법에 따르면 가장 강한새끼가 후계자가 되는게 상관없어서 장남이고 나발이고 필요없었다
무굴제국같은 경우는 6명의 유명한 황제중 아우랑제브-후마윤-샤자한-지한기르칸이 아버지몰아낼려고 폭동일으킨 경력이 있어
다들 알다시피 이슬람 지도자들은 아내들이 존나 많다보니 기본적으로 자식들이 존나 많아 결과적으로 메메트1세가 제국을 통치할당시
제국은 여러 세력으로 쪼개져 있었고 메메트1세는 통치기간동안 제국을 규합하고 아나톨리아에서 세력을 되찾고자 노력했지
그는 굉장히 빠른속도로 제국의 경쟁자들을 운지시켰는데 워낙 통치내내 반란과 경쟁자들이 끊이질 않아서 대외팽창을 거의 하지 못했던
술탄이였어 참고로 오스만의 두번째 건립자라고 불리는 인물이야 신사라는 별명도 있었지
메메트1세가 제국을 안정시켰지만 무라트2세는 붕괴직전의 제국을 통치하고 있었어 사실상 앙카라전투 이후 발칸에서의 영향력은 굉장히
약화된 상황이였고 아나톨리아에서의 위상도 이전같지 않았지 무라트2세는 16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이걸로 주변에서는 오스만을
붕괴시킬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결과적으로 동로마, 세르비아, 헝가리, 폴란드, 신성로마제국이 반 오스만 동맹으로 참여해
하지만 카톨릭연합을 1448년 코소보에서 분쇄시키면서 세르비아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발칸에서의 위상을 되찾아 참고로 오스만제국군의
비정규군 체계를 확립한 인물이야
드디어 메메트2세의 차례야 이때까지 오스만 초기 200년 역사를 대충 알아봤으니 이당시 오스만이 어떤 상황인지 느낌이 올꺼야
메메트2세는 통치기간을 살펴볼때 특이한점을 알수있어 12살에 1번 아버지가죽은 21살에 1번 술탄으로 즉위를 하는데
사실 메메트2세는 아나톨리아에서 카라만 에미르국과 평화협정이후 몇차례의 패전에 책임을 느껴 은둔을 결심하는데 이때 12살이였던
아들인 메메트2세를 술탄으로 앉히고는 홀연히 떠나버린거지 판단력 ㅆㅅㅌㅊ?
아무튼 메메트2세의 즉위당시 헝가리의 명장 야노수 훈니야디가 이끄는 헝가리-세르비아 연합군은 오스만을 조지기위해 즐겁게 뛰어오고
있었어 이런 와중에 메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치자!' 라고 말했는데.. 당연히 예니체리부터 시파히에 이르기까지 이말듣고 뒷통수
안붙잡은 군인은 없었을꺼야 결과적으로 예니체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메메트2세는 아버지인 무라트2세에게 편지를쓰게되
"술탄으로써 내가 지금 당신에게 명령하노니 돌아와 나의 군대를 이끄시오"
존나 부자관계 ㅆㅅㅌㅊ;;
무라트2세는 바로 전투에 나가는데 바르나전투에서 오스만 십자군을 상대로 싸웠는데 이전투로 오스만 십자군은 붕괴되었을뿐 아니라
마지막 피아스트 왕조의 남성군주인 왈디슬라프3세가 전사하면서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배경이되
이후 야노스 훈니야디가 이끄는 헝가리-세르비아 연합군을 코소보전투에서 격퇴시키면서 세르비아는 완전히 힘을 상실했고
사실상 메메트2세대신 무라트2세가 7년간 치세를 하면서 발칸에서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제국을 위기에서 구해냈어
그리고 1451년 무라트2세가 서거하자 메메트2세가 집권을 시작하는데 메메트2세의 즉위당시 제국의 상황을 봤을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존나 좆망이다;
오스만 십자군의 참여국가를 보면 당시 제국이 얼마나 고립된 상황인지 알수있지
폴란드-헝가리-크로아티아-보헤미아-리투아니아-왈라키아-몰다비아-불가리아-신롬-교황청-튜턴기사단등은 오스만 십자군 이후에도
당연히 계속 오스만을 적대했지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
더군다나 1451년 제국의 강역이였던 알바니아에서 스칸데르베그라는 영웅이 반란을 일으켰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작은 알바니아
를 독립시키고 알바니아라는 국가의 독립영웅이자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으로 에디르네의 엔더룬학교(군사엘리트 양성기관)과정을
수료하고 제국에서 티마르를 수여받고 시파히작위를 받은 인물인데 오스만이 약해질 기미를 보이자 반란을 일으킨거야
당연히 군사적 역량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였기에 메메트2세가 보낸 군대를 모두 격퇴하고는 알바니아 일대에 세력을 형성해
하지만 메메트2세에게는 이런 반동분자보다 중요한 목표가 있었어
12살때부터 메메트2세의 소원은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이였지 그는 즉위와 동시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위해서 보스포루스 해협에
수많은 해군기지와 기지들을 깔기 시작하고 당연히 동로마에서는 위협을 느껴서 몇차례 사자를 보냈지
당시 동로마에는 메메트1세 당시 망명했던 오르한 태자가 있었는데 동로마는 이 오르한 태자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몇차례인가 오스만과
충돌했었고 덕분에 메메트2세는 동로마를 살려줄 생각같은건 하나도 없었어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너무나도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야 600년대 처음 만들어진 이 거대한 요새는 당대 최고의 요새로써
요새기술이 발달한 중세유럽의 요새중에서도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받고있는데 해안가를 따라서 성벽이 쳐져 있는데 이곳으로는 진입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고 3중성벽과 일정한 거리마다 배치된 요새탑 바다를 지키기위해 금각만에 쳐진 쇠사슬과 해자는 슬라브족과
이슬람등이 수십만 군세를 이끌고 비쟌틴의 문앞을 두드렸을때 제국을 안전하게 지켰고 이제껏 무력으로는 한번도 함락된적 없었던
요새중의 요새야 하지만 동로마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는데.. 이 거대한 요새를 지키기위한 군사가 부족했고 하나의 탑에 배치될수 있었던
병력은 2~3명밖에 되지 않았어 참고로 요새의 규모가 수km에 달하다보니 지키는 입장에서 병력이 부족하다면 굉장히 골때릴수밖에
없었지 거기가 메메트2세는 헝가리에서 대포기술자인 우르반을 불러서 그 유명한 우르반대포를 동원해
존나 거대하지? 사용하기 위해서 소가 수십마리 필요했다고해 이런걸 수십문 가지고 성벽을 때려부수기 시작한거지 결정적으로는
메메트2세가 배를 육지로 끌고 넘어가서 기습을 때려서 7주동안의 공성전이 끝이나 10배나 많은 병력과 존나 거대한 거포로 때렸음에도
이 요새가 얼마나 단단한 요새였는지 알수있지 결과적으로 이 대포는 존나 그냥 상징적인거지 이걸로 이긴건 아니였어
메메트2세는 요새안에서 싸웠던 제노바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은 3일동안 무자비한 약탈이 있었고 뒤늦게 문화걱정을
시작한 메메트2세는 3일뒤 약탈중지를 선언해
아무튼 이 메메트2세의 콘스탄티노플점령은 중세와 근세의 분류선으로 여겨지기도해 2천년을 이어진 로마가 멸망한 날이자
요새의 시대의 종말을고한 날이였으니까
메메트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면서 2가지 칭호를 얻게되
하나는 콰이져 이 룸 즉 로마의 시저라는 칭호였고 하나는 파티- 이건 정복자라는 칭호로 터키에서는 파티 메메트라고 하면 이 메메트2세를
의미하는 말이야 이 업적으로 메메트2세는 이슬람세계에서 '무슬림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것이다' 라는 예언을 성취해서 그 위상은
하늘 높이 올라가 덕분에 메메트2세는 이후 절대군주급의 왕권으로 반대파를 숙청하지 대표적으로 동로마와 내통하였던 재상 할릴 파샤를
전투가 끝난뒤 바로 처형시켰어
여기서 서방세계는 충격에 빠졌는데 1000년간 동부의 방어벽이였던 동로마가 멸망했을뿐 아니라 기독교의 성지이자 '도시중의 도시' 라고
불리웠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업적들은 그의 즉위후 2년뒤에 있었던 일로 시작에 지나지 않아..
메메트2세는 코소보전투이후 속국상태가 되어있던 세르비아를 완전히 지도에서 지워버리기 위해서 출정하지 이때 루마니아산 헝가리의
명장인 야노슈 후니야디가 국왕이 도망친 베오그라드에 도착 야간 기습을 시도하는데 역으로 후니야디한테 실컷처맞고 패배하자
이때 메메트2세가 아 씨발; 자살할까.. 하면서 실제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충격이 엄청났던것같아
아무튼 얼마안가서 후니야디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는데 베오그라트전투 이후 몇개월 뒤의 일이야
이후 메메트2세는 정신을 회복해서 세르비아를 마저 조지고 팔라이올로고스왕조의(동로마 콘스탄티누스 11세의 가문)잔재인 모레아를
공격해서 점령해
명장 후니야디
이후 트레비존드에 남아있던 콤네노스가문과 혼인동맹을 맺은뒤 지도자였던 존의 사후 트레비존드를 제국의 세력권에 편입
흑해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영향력을 확대한후 왈라키아로 진군하게되
너무나도 유명한 가시공 블라드
너도나도 죽창꼬챙이면 만인평등
다들 드라큘라의 모티브가 되는 이사람을 잘 알고 있을꺼야 어린시절 오스만에서 보낸 고통스러운 기억들로 성격이 좀 망가진 양반이였는데 오스만에서 배워온 '꿰뚫기' 형을 시행해서 사람들이 경악했었지 참고로 왈라키아에서는 대왕에게 붙는 칭호인 'the Great' 라는 칭호로 불려
블라드는 어린시절 죄수의 신분으로 오스만에서 4년간 보냈었는데 이때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오스만에 대한 적개심이 만랩이였지
사실 오스만이 왈라키아를 침공하게된 배경은 메메트2세가 왈라키아에 돈좀 뜯어볼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그걸 가시공이 모욕을 주고는
사신을 바늘에 꿰서 죽여버렸지
이에대한 보복으로 메메트2세는 왈라키아의 남녀노소를 학살하면서 진군 왈라키아인 포로는 모조리 죽였고 가시공은 헝가리로 도망가
1부 끝
2부 시작
Mehmed the Conqueror(1432~1481)
재위(1444~1446, 1451~1481)
2부에서는 베니스와 오스만의 관계가 악화되는 배경과 왈라키아전역 이후의 메메트2세의 행적을 알아볼까해
알바니아의 국부 스칸데르베그
1463년 이미 제국의 속국으로 전락해있던 보스니아를 완전히 병합해
이때까지 베니스와 오스만의 관계를보면 양호한편인데 사실상 오스만에 아라곤과 연합해서 십자군을때리고 계속해서 테살로니카부근에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스칸데르베그를 협공한적도 있었어
이렇게 스칸데르베그를 상대로 공동전선을 형성한적 있었던 두 나라였지만 문제가 생겼지..
에시당초 베니스는 가톨릭국가일뿐 아니라 이익을위해서면 언제든지 오스만과 관계를 끊을 생각이 있었고 당초에 역사적 행보를 보면
베니스는 굉장히 실용과 이익, 뒷통수에 특화된 국가였고 메메트2세도 이런 베니스와 크게 다를바가 없었어
마침 알바니아인 노예가 오스만국고에서 돈을훔쳐서 베니스의 요새로 도망을가는데 오스만은 노예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베니스가 거부했고
이일을 빌미로 오스만이 베니스를 선제공격 함으로써 기나긴 오스만-베니스의 적대관계가 형성이되
베니스는 사실상 용병을 고용하고 다른 유럽국가들과 연합한다면 당시의 오스만과는 어느정도 싸움이 가능한 강력한 국가였어 하지만
베니스의 국부는 동방으로 무역을하면서 얻어내는 것이였는데 흑해무역로와 아나톨리아의 항로들을 손에 쥐고있었던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베니스는 자금력에서 밀릴수밖에 없었어 하지만 베니스는 오스만을 상대하기위해 나름 준비를 했지
일단 기본적으로 오스만을 상대하기위해서 교황에게 십자군을 요청함과 동시에 펠레폰네소스에 잔존하는 팔라이올로고스의 왕족들과
그리스의 반군들을 적극이용하기로 했지 또한 오랫동안 적대적 관계를 유지했던 알바니아와 연합했고 오스만의 오랜적국인 헝가리
백양한국, 카라만 에미르국등에도 사신을 파견해
더불어서 육로를 동맹국들이 책임질동안 함대로 해안가를 강습하는게 주 전략이였지 이전략은 굉장히 효과적이였고 통하는것처럼 보였어
오스만을 사방에서 공격해서 군대를 분산시켰으며 베니스는 일시적으로 모레아를 점령했지 더군다나 동방의 동맹군인 카라만국은
아나톨리아에서 2번째 세력을 가진 국가이지만 본래 오스만 이전 아나톨리아의 맹주로써 오스만으로서는 굉장히 껄끄러운 상대였어
이탈리아 경기병용병인 스트라디오트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운용되었던 스트라디오트 기병대는 발칸출신의 경기병대로써 지휘관중에는 팔라이올로고스 황가나 콤네노스황가의 인물들도 있었다.
이런상황이다보니 메메트2세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동방으로 향했고 마흐메트 파샤나 자간 파샤같은 인물들은 메메트2세가 동방에서의
전역을 수행하는동안 베니스와의 전투를 이끌어나갔지 제국은 모레아전역에서 성공적으로 적을 방어했을뿐 아니라 오히려 모레아의
베니스요새들을 함락시켰고 비슷한시각 메메트2세도 카라만 에미르국을 상대로 승기를 잡았어
백양조(아크 코윤루)의 샤힌샤 우즌
이제 오스만은 확실히 승기를 잡았고 오히려 알바니아로 역공을 시도하지만 스칸데르베그의 방어에 막히게되지 이러는 도중 동방에서
백양한국의 지도자인 우즌 하산은 카라만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서 참전해 1472년 우즌은 참전과 즉시 아나톨리아를 유린하기 시작하지
메메트2세도 이 강력한 호적수를 상대하기위해서 동방으로 말머리를 돌려
여기서 아크 코윤루 즉 백양조을 집고 넘어갈게
중동의 거인이였던 티무르조의 분열이후 여러 세력들이 서로 패권을 다퉛는데 이중 라이벌이던 흑양조(카라 코윤루)를 정복하고
당시 최대세력을 구축했던 왕조야 특히 샤힌샤인 우즌 하산때는 티무르의 아부 사이드를 격파하고 세력을 더욱이 확장 더불어 이슬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인 바그다드를 점령하지.
이후 우즌의 사후 후계자 분쟁과 다민족국가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분열해버리는 국가야
아무튼 당시 지도자였던 우즌은 굉장히 강력한 지도자였어 티무르와의 전쟁과 정복전쟁사업을 훌륭히 완수했지
이런 백양조의 지도자 우즌은 자신만만하게 아나톨리아 깊히 들어갔고 오스만의 메메트2세와 오틀룩벨리에서 격돌하게되
오틀룩벨리전투는 대포와 화기의 지원을받는 근세적 오스만군대와 몽골의 기병대전통을 이어받은 백양조의 전투였어 백양조에서는
한번도 본적없는 군사교리를 사용하는 오스만군에게 수많은 사상자를내고 백양조는 후퇴를하지 이전투의 결과로 백양조는 그들의
제국 서부에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오스만은 아나톨리아와 제국동부에 거의 무조건적이라고 할수있는 영향력을 얻어
이후 오스만군은 알바니아를 공격하기전에 잠시 몰다비아를 공격했다가 몰다비아의 스테판3세의 강력한 저항과 역병에 못이겨서
후퇴하지 이와중에도 제국의 군대는 크림반도에 남아있는 서방세력및 동로마의 잔존세력들을 소탕하고 크리미아 칸국과 동맹을 맺지
여담으로 말하자면 크리미아 칸국은 몽골이 서방에 남긴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징기즈칸의 직계후손이 다스렸어
알바니아를 공격할때 스칸데르베그는 이미 말라리아로 세상과 작별인사를 했던 상태야 이런 알바니아를 공격해서 정복하는데 이때의
영토는 대략 저기있는 지도에서 맘루크조의 영토와 로도스를 빼고 전부 오스만영토라고 생각하면 될꺼야
이제 모든수가 사라진 베니스는 오스만과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맺었고 100000만 두캇을 일시불로 지불하는데
여기서 두캇의 카치를 집고 넘어갈게
두캇은 지중해에서 굉장히 보편적인 화폐였어 이 두캇이라는 화폐는 지금으로 따지면 5만 6천원정도의 가치를 가지는데 이건 당연히
현대로의 가치고 현대와 비교해서 600~1000불정도의 개인소득을 가졌던 당시와 현제를 비교하면 당시의 실질적 두캇의 가치는
대략 120~180만원정도의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당시의 물가까지 생각해보면 사실 200만원이상의 가치가 있다고도 할수
있겠어 고로 100000두캇이면 현대가치 대략 2조정도라고 생각하면 되겠네 맞나 모르겠다 시간나면 계산해봐
아무튼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야
이후 메메트2세는 기독교세계를 농략이라도 하듯이 이탈리아 남부에 군대를 드랍시켜; 이때 상륙한 지역의 인구의 70%정도 죽거나
도망가지 이당시에 메메트2세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공포의 대상이였으니까 참고로 상륙만한게 아니라 1년정도 점령하고 있었어
이후 이지역에 체류중인 오스만군이 알바니아로 돌아가자 그제서야 교황청에서 이지역을 회복할 생각을 하게되지
메메트2세는 이후 맘루크를 공격할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1481년 4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그의 생에가 끝나게되
메메트2세 사후의 일화가 유명한데
메메트2세가 죽자 유럽의 모든교회에서 일제히 종을 울리며 안도했다는 일화가 유명해 메메트2세는 유럽인들에게 있어 공포이자
투르크인들의 영웅으로써 눈을감았지
다음에는 3부를 쓸려고하는데 3부에서는 메메트2세의 업적과 인품 그밖에 메메트2세와 싸웠던 명장들에 대해서 알아볼까해!
나름 시간들여 썻는데 재밌게 읽어줬으면 고맙겠다 그럼 일게이들아 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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