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세계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만주를 선전포고도 없이 침략하여
'만주국'이라는 괴뢰정부를 세우고 불법으로 점거하게 된다
당시 만주국에 위치한 관동군(일본군)은
국경선을 가지고 몽골, 소련과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사건은 할힌골(노몬한)에서 일어나게 된다
당시 국경선이던 할힌골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였는데
몽골군과 일본군 모두 사소한 신경전을 벌일뿐
큰 전투는 행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1939년 5월 11일
약 7~90명의 몽골군 기병이 할하강을 건너온다
관동군(일본군)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지만 이를 불법 월경으로 간주
몽골군에게 응징을 가하기 위해 병력을 총 동원하여 할하강을 건넌다
이에 당시 몽골과 상호원조조약을 맺고있던 소련군과 충돌
제1차 할힌골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관동군의 병력은 대략 2000명 소련군의 병력은 대략 1500명으로
관동군이 숫적인 면에서 우위를 보였으나
장갑차, 야포, 자주포의 숫자와 성능등
질적인 면에선 소련군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질적 우위를 바탕으로 관동군의 50% 이상을 섬멸시켜
관동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보았다
하지만 지상전과는 다르게 공중전은 관동군의 우세였으나
전투속행이 어렵다는 판단하에 6월 1일 관동군이 먼저 퇴각하게된다
이 전투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제2차 할힌골 전투로 이어지게된다
6월 27일
관동군은 약 107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소련의 항공기지를 급습한다
소련은 100대 이상의 항공기 손실을 보았고
항공기지도 절반이상이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게된다
이에 당시 소련 외무인민의원이였던 몰로토프는
단순한 보복을 넘어 국경을 정하는데 있어
소련의 우위를 확실히 해야 한다고 주장
소련의 최고지도자였던 스탈린이 이를 받아들여
게오르기 주코프를 총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게된다
당시 게오르기 주코프 휘하에 있는
소련군의 총 병력은
1개 차량화 보병사단
2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여단
2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항공여단
6개 항공연대
전투기,폭격기 557대
전차 498대
이에 맞서는 관동군의 총 병력은
1개 차량화연대
1개 공병연대
1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
2개 전차연대
전투기,폭격기 250대
항공기 135대
숫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물량이였다
게다가 관동군은 단순히 숫적 열세에만 처해진것이 아니였는데
당시 관동군이 사용하던 주력 전차는 89식 중전차나 97식 전차로
소련군의 BT-5나 T-46등의 성능에 한참을 뒤지고 있었으며
소련군의 전차에 비하면 관동군의 전차는 그야말로 승용차 같은 수준이였다
당시 일본군은 과거 러일전쟁의 승리를 떠올리며
소련군을 크게 얕잡아보고있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것이 큰 오만임을 깨닫게 된다
7월 2일
관동군은 1만여명의 병력과 80대의 전차 그리고 100문이 넘는 대포로 소련군에게 공격을 가한다
하지만 소련군은 500대에 육박하는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대규모의 포병을 준비해놓고 있었으며
이에 관동군은 수적 열세와 질적 열세를 모두 겪으며 수천여명의 사상자와 함께 대패하게되고
약 4~5일간 일방적으로 패주하게 된다
하지만 관동군의 대전차총검술(말 그대로 전차를 상대로 칼로 돌격)과
화염병 같은 처절한 전략으로
소련군의 사상자도 수천여명에 달하게 된다
이윽고 전투는 소강상태에 접어들게 되고
관동군의 공세가 소진되길 기다리던 소련군은
8월 20일 드디어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다
소련군은 대규모의 전투기, 폭격기, 전차, 장갑차와
5만명에 달하는 대병력으로 강을 도하하여 관동군을 공격한다
또한 500대의 전투기가 관동군의 기지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으며
포병들의 대규모의 포격도 함께 가해졌다
관동군도 이에 질세라 질적, 수적인 열세를 무릎쓰고
마찬가지로 대전차총검술, 화염병 같은 전략으로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된다
하지만 대규모의 소련군은 이에 아랑곳하지않고 관동군을 포위하기 시작하여
결국 8월 25일 관동군은 소련군에게 완전히 포위된다
포위된 병력을 구원하기 위한 작전이 수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하였으며 결국 관동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만주국으로 겨우겨우 후퇴하게 된다
소련군에게 포획된 관동군 포로
소련군이 노획하여 전시한 일본군 전차
당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최초로 대참패를 맛봤으며
러일전쟁 이후 얕잡아보던 소련을 두려워 하게 된다
그 여파로 이후에도 일본은 소련에게 쩔쩔매는 신세가 되었다
할힌골 전투는 사상자만 5만이 넘는 대규모 전투였으나
일본에선 이 전투를 전투가 아닌 사건으로 격하시켜
'노몬한 사건'으로 부르며 별거 아니다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또한 할힌골 전투를 일본의 승리라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도 대거 등장하였으며
일부 교과서에선 일본군의 승리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에 2009년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할힌골 전투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해
"이 사건의 본질을 바꾸는 날조는 용납하지 않겠다"라고 연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