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안녕 게이들아 스섹!
지난 1부가 ㅇㅂ도 못가고 계속 묻히길래 썅 그냥 접어야겠다 마음 놓고 있었는데, 재업하니까 되더라고. 역시 일베는 타이밍인 것 같아. 내가 입대가 얼마 안남아서 장기간 연재는 못하겠지만, 남은 기간 다른 꿀잼 이야기 보따리(자오곡 말고)들을 풀 수 있으면 풀도록 할게.
그리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 떡밥은 올리는 순간 나와 같은 수많은 좆문가들이 등판하여 풀발기하며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더라고. 노무 많아서 일일히 답글 달지 못하고 여기서 몇 자 적을게. 물론 이러한 논쟁을 먹이로 살아가는 좆문가가 보기에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니까 더욱 뜨거운 성원 부탁한다.
하지만 게이들이 조금만 더 융통성있게 생각해줬으면 한다는 아쉬운 바램도 있어. 비록 제갈량이 위연의 계책을 묵살했지만 그렇다고 제갈량이 잘못되었다고 한 적은 없어. 또한 자오곡 계책 이야기하고 있는데 뜬금 없이 북벌 자체의 당위성을 놓고 ㅁㅈㅎ주는 좆문가들이 보였는데, 나 역시 애초에 북벌이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근데 지금 그 이야기하는게 아니잖아? 이제 막 하나의 챕터가 끝난 거고, 글이 완결이 나지도 않았는데 그게 전부인양 풀발기하더라고. 역사에 만약이란 없고, 만약에는 정답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어쭙잖은 잡설은 집어치우고, 바로 2부 들어가도록 할게.
▲ "좆까고 일루와 위연. 우린 오장원으로 간다!", 공명은 어째서 자오곡의 계를 묵살하였을까?
우리는 지난 1부에서 위연의 자오곡 계책이 상당히 치밀하게 짜여진 현실적이고도 훌륭한 작전임을 알 수 있었어. 하지만 제갈량은 이를 물리치고 기산(오장원 방면)으로 진출하여 결국 참패를 경험하고 말아. 자체가 기습이 되었던 1차 북벌 이후, 사실상 북벌은 불가능한 벽이 되버리고 말았지. 그렇다면 어째서 제갈량은 위연의 계책을 묵살하였던 것일까?
그 단서를 당시 위연이 했던 말 가운데 찾아 볼 수 있어. 위연은 자신의 안이 기각되었을 때 아쉬운 마음에 제갈량을 가리켜 '겁쟁이'라고 표현했어. 그가 제갈량 보고 무지한 자가 아닌 겁쟁이라고 비난했다는 점은 제갈량이 위연의 계책을 취했을 경우 장안 점령은 물론, 함양 이서의 탈취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 그렇다면 제갈량이 위연의 계책이 가지는 이점과 실현 가능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작전의 위험성을 위연보다 높게 보았던 것인데, 위연과 제갈량이 가지는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계책이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유가 되는 것이지.
우리는 이 이유로서 크게 다음의 세 가지 면을 고려할 수 있어. '1. 제갈량가 위연이 가지는 정보의 차이', '2.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 '3. 제갈량과 위연이 가지는 입장의 차이' 정도야. 이 세가지를 살펴보고나면 자연스럽게 이 글의 결론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1. 제갈량과 위연이 가지는 정보의 차이
먼저, 과연 위연이 가지는 정보가 제갈량에 비해 모자랐던 것일까? 이것은 크게 두 가지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인데, 첫 째는 북벌이 수행될 섬서 방면에 대한 정보요, 둘 째는 북벌을 수행하는 촉한 내부의 정보야.
섬서 방면의 정보는 실제 일어난 촉한의 1차 북벌 경과와 위연의 계를 비교 분석해보면 알 수 있어.
먼저 제기되는 쟁점은 하후무의 자질을 무시하던 근거의 정보가 정확했느냐가 되겠지. 1부에서 언급한 위략의 자료 외에도 실제 일어난 북벌의 전개를 통해 이 점은 또 한번 확인돼. 바로 하후무의 교체 시기야. 여기에는 두 가지 추정이 가능하지. 첫 번째 추정은, 앞서 언급되었던 위략에 따르면 하후연의 뒤를 이어 하후무가 관중을 감독했다고 알려줘. 그런데 명제기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다시 조진으로 교체가 되지. 즉 하후무에서 조진으로 권한이 넘어갔다는 것을 의미해. 이 추정이 맞다면, 위연의 말처럼 하후무의 무능을 위나라 조정이 직접 증명하는 셈이라고 볼 수 있겠지? 두 번째 추정은 북벌 이전에 하후무의 소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장안을 책임지고 지켜야할 사람이며 관중의 감독을 책임져야할 사람을 타인과의 교체 없이 소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위나라가 촉의 북벌에 무지한 상태에 있었음을 의미하며, 하후무의 무능이 그만큼 컸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 더구나 위연의 무지하다 말한 하후무 조차 없었다면 장안 함락이 더 쉬워졌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찌되었든 두 추정 모두 위연이 신뢰할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데 힘을 실어준다고 볼 수 있어.
또 다른 쟁점은 곽회의 소재에 대한 정보라고 볼 수 있어. 곽회는 당시 위나라의 명장으로 옹주자사의 직위로 관중에 있었어. 만약 곽회가 장안에 있었다면 자오곡 계책이 실패할 확률 또한 높아지게 되는거지. 물론 옹주자사인 곽회는 그 지역 방면의 가장 큰 도시인 장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긴 해. 위연이 곽회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이 정보의 부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 하지만 관련 자료 어디에도 곽회가 장안에 있었다는 점을 나타내지 않고 있어. 반면에 곽회가 장안에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자료는 있지. 모두 위략의 자료인데, 첫 째는 위연이 자오도 계책을 통해 장안 공략을 논하면서 곽회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야. 독한중으로서 그 지역을 10년동안 담당했던 위연이 그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 근거가 되는 것이지. 둘 째는 아래의 내용이야.
'천수태수 마준이 강유와 여러 관속을 이끌고 옹주자사 곽회를 따라 서쪽으로부터 낙문(洛門)에 이르렀다. 이 때 제갈량이 이미 기산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곽회가 마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것은 좋지 않을 수 있소!" 마침내 곽회는 말을 달려 동쪽 상규성으로 돌아갔다. 마준은 기현의 치소 경계가 서쪽에 치우쳐 있는 것을 생각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작란할 것이 두려워서 또한 곽회를 쫓아가버렸다. 이 때 강유가 곽회에게 말하였다. "태수께서는 기성으로 마땅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마준이 강유 등에게 말하였다. "그대와 같이 돌아가자 하여 신뢰를 얻고자 하지만 모두 기실 반적들이오!"' (삼국지 촉서 강유전 주에서 인용된 위략 中)
이러한 위략의 내용들과 여러 정황들을 살펴보면 곽회는 장안이 아닌 제 3의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보여. 더불어 실제 옹량의 반란을 평정한 것은, 옹주자사 곽회가 아닌 하후무에서 교체되어 관중의 책임자로 온 조진이었다는 점을 보면, 곽회의 실제적인 배치에도 약간의 의문을 가질 수 있지.
▲ 곽회는 위나라의 ㅅㅌㅊ 명장 중 하나로, 주로 촉한의 북벌에 맞서 활약해.
▲ 조진은 제갈량의 군사적 라이벌로, 1차 북벌을 저지함을 비롯해 이후의 북벌에서도 번번히 그를 좌절시켜. (참고로 삼국지 조진전에 따르면 조진이 역으로 자오도를 통해 촉한을 침공할 작전을 세우고 출전까지 하였으나, 큰 비가 30여일이나 내리는 바람에 포기하고 돌아간 일화도 있어. 아이러니하노?)
위연은 219년에 유비에 의해 독한중에 임명된 이후로 최전선인 한중에 계속 머물렀으며, 북벌 당시에는 독전부, 승상사마, 양주자사 등을 역임할 만큼 군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어. 이를 볼 때 그가 위나라 정보에 대해 무지했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지. 오히려 장안 방면의 정보에 관련해서는 제갈량을 능가했으면 능가했지 부족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이것은 제갈량이 위연을 승상사마로 삼은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어. 당시 위연은 진북장군이며 동시에 양주자사였으므로 승상사마라는 직책은 그에게 큰 의미가 부여될 수는 없었을거야. 그럼에도 제갈량이 굳이 위연을 승상사마로 임명한 것은, 제갈량이 위연을 다스리기 위한 임명인데 바로 위연이 가진 정보의 중요성을 제갈량도 충분히 인지했기 때문이라고 보이기도 해.
▲ 나도 포스타급 사령관이랑께.. 내가 그 정도로 생각이 없어보이노? (특히 나관중 썅년아..)
더욱이 위연은 군량의 현지 조달의 뜻을 나타냈어.
'장안성 안에는 단지 어사와 경조태수만이 있을 뿐이므로, 횡문(橫門)에 있는 식량 저장 창고와 흩어지는 백성들의 곡물로 군사의 식량은 충분할 것입니다.' (삼국지 촉서 위연전 주에서 인용된 위략 中)
위 대목에서 보이듯 그는 비교적 상세하고 구체적인 현지 조달의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는데, 이 같은 점들은 그가 철저하고 치밀하게 오래 전부터 세작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해왔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지.
그가 현지 조달의 뜻을 분명히 드러낸 것은 그가 승리에만 집착하는 일개 장수이며, 촉한 국정의 전반을 고려하는 제갈량보다 못하다는 일부 견해를 반박하는 자료로 사용되기에 충분하다고 보여. 왜냐하면 당시 촉한의 국력으로는 전쟁의 장기화를 견딜만한 재정 상태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지. 촉나라의 북벌이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한 중요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촉한의 식량 부족에 있었어.
대체로 문제시 되는 것은 촉한의 낮은 수송 능력이었지만, 이외에도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던 것으로 추정돼.
'9년(231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출격하였으며, 목우(木牛)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운반했는데, 식량이 다 떨어졌으므로 군대를 철수 시켰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中)
'12년(234년)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사곡도에서 출병하였는데, 유마(流馬)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으며, 무공현(武功縣) 오장현(五丈縣)을 점거하고, 사마선왕과 위남(渭南)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항상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아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될까 걱정하였으며, 이 때문에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여 장기간 주둔할 기초를 만들었다.'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中)
위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목우유마라는 특수한 수송 도구를 만들어야할 필요성이 있었음과 동시에 둔전 등을 시행하여 전방에서 식량을 확충해야만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 이로 보아 촉한은 수송 능력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애초에 수송해야할 식량 자체도 부족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 이러한 점에서 촉한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현지 조달이 하나의 큰 요소가 되어야만 했지. 그러한 면에서 적극적으로 현지 조달의 의지를 나타낸 위연의 계는 촉한의 내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어.
2.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
자, 우리는 위연이 가진 정보력에 대해 가지고 있던 여러가지 의심들을 어느정도 덜어내도 괜찮다라는 것을 확인했어. 사실 대다수 논객들은 위연의 능력에 대해서는 계속 의심을 표명하는 반면, 제갈량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의심의 시선을 거의 보내지 않고 있는 실정이야. 자오곡의 계에서 제기되는 몇가지 쟁점들인 10일 간의 자오도 주파 가능성, 하후무 무능의 근거, 그리고 곽회의 행방 여부 등의 쟁점들은 기실 일방적으로 제갈량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위연에게는 낮은 점수를 주는 기존의 관념들이 만들어낸 쟁점들임은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봐.
자오곡 계책을 제갈량이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거절했다면, 알아봐야 하는 쟁점은 두 가지야. 그중 계책의 당위성을 이미 살펴보았으므로, 이번에는 과연 제갈량의 판단은 정확했는가를 알아봐야 겠지.
▲ 연의에서 군신으로 여겨지는 제갈량. ㅅㅌㅊ임은 틀림 없지만, 실제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잘 알고 있을거야.
여기서 잠깐, 일본의 다카시마 도시오 교수는 자신의 저서 '삼국지 오디세이'에서 제갈량에 대해 재미난 평을 남기고 있어. 조금 긴 내용이라 좆문가가 아닌 일게이들에게는 조금 어려울 수도 있을거 같지만, 워낙 흥미로운 내용이라 인용하도록 할게!
'제갈량의 팔진도(일종의 군사 전법)는 당나라 무렵까지는 전해지고 있었다. 당태종과 군사이론가 이정이 제갈량의 팔진도를 둘러싸고 나눈 문답이 청나라 장주가 엮은 제갈무후집의 고사4, 제작편에 나온다.
두 항목이 있는데, 하나는 <큰 진이 작은 진을 감싸고, 대영이 소영을 감싸며, 우락구련하여 곡절 상대한다.>라는 간단한 것이고, 또 하나는 제법 길다. <진의 수는 아홉이다. 중심의 영은 대장이 장악하고, 사면팔방은 모두 그 지휘에 따른다. 진 사이에 진을 넣고, 대 사이에 대를 넣어, 앞으로써 뒤가 되게 하고, 뒤로써 앞이 되게 하여, 나아감에 속분없고 물러남에 거주없어, 사두팔미가 충돌한 곳이 머리가 되어 적이 그 안을 치면 양두가 이를 구원한다. 수는 5로 일어나 8로 끝난다.>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실전의 진법이라기보다는 신비적인 공론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다면 대장이 전체를 수족처럼 조직적, 유기적으로 움직여서 싸우는 중국식 전법이 과연 강했던 것일까? 역사적으로 북방이나 서방의 이민족이 침입해오면 대체로 패한 것으로 봐서 그다지 강했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전법이 중시된 것은 중국이 전통적으로 극단적인 문존무비(文尊武卑)의 나라기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우수한 청년에게 군사교육을 시켜 장교나 지휘관으로 양성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을 뿐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들어 유용한 군대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구미나 일본에서 많은 장교들을 초빙하여 군대의 조직에서부터 훈련까지를 전부 의뢰해야 했던 사정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중국에는 '군인'이라고 할만한 자가 없었던 것이고, 20세기에 들어 비로서 군관학교 즉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학교가 생겼다.
과거 중국에서는 우수한 청년은 모두 학문을 힘쓰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하나같이 옛 전적(典籍)을 읽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리고 고급관료가 되면 주어진 직종에 따라 군대의 최고 지위에 올라 일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조조나 원소가 그랬다. 유비는 공부를 싫어하는 불량아였지만, 가문이 가문인지라 얼마간 학문도 했다. 삼국시대는 난세였으므로 여포나 손책처럼 온갖 고초를 다 겪고 올라간 사람이 일군의 총수가 되는 예도 생겼지만, 평시에는 그런 예가 없었다.
여포나 손책은 중국에서는 무척 이질적인 장군으로서 선두에 서서 창극을 휘두르며 적진으로 돌입해 들어가는 타입이지만, 보통의 문관 장군은 조조나 원소처럼 뒤쪽에서 지휘를 한다. 그런 경우에는 전체를 조직적으로 움직일 궁리를 한다. 지금 여기의 당면 현실과는 무관한 옛 서책을 읽고 지성을 닦은 사람이라서 아무래도 이론이나 관념이 앞선다. 그래도 조조처럼 전투 현장에서 부단히 위험한 순간을 겪다 보면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이 실전형으로 바뀌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탁상공론이나 독선, 혹은 유희적으로 되고 만다. 신비철학적 색체가 두드러진 진법이론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누구보다도 마속의 경우가 바로 그랬을 것이다. 젊고 머리도 좋은데다 군사이론을 즐겼다. 고금의 전사와 전략전술을 입에 올리기 시작하면 정말이지 끝이 없다. 마속에게 전쟁을 지휘하는 일은 마치 지금의 텔레비전 게임과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가정 전투를 앞두고 마속의 머릿속에는 분명 장합이 어떤 식으로 나올 것이지 등등, 만에 하나라도 착오가 없는 필승의 계책이 빈틈없이 완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의 프로인 장합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장합은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싸움꾼이다.)
또한 이 마속을 높이 평가하여 중요한 전투를 맡긴 제갈량에게도 그런 경향이 제법 있었던 게 아닐까. 어쨌든 제갈량 자신도 마속과 마찬가지로 이 1차 북벌 때까지 실전 경험이 없었다. 그렇게 보면 여덟 가지로 변화했다는 팔진도도 필시 정묘하기는 했겠지만, 과연 실전에 적용할 만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해마다 무리를 움직이고도 아직 능히 공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응변의 장략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군사가로서의 제갈량에 대한 진수의 평가다. 한껏 호의적으로 말해서 그 정도였던 것이리라.'
이 같은 다카시마 도시오의 평은 대단히 날카롭다고 볼 수 있어. 전쟁 하나만큼은 젊어서부터 해온 '프로'인 유비는 육손의 말 가운데서도 보이듯이 조조 조차 두려워한 실력자였지. 그런 유비였기에 마속을 정확히 평가할 수 있었을거야. 반면에 전쟁의 실전 경험이 없던 제갈량은 마속을 중용하지 말라는 선주(유비)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그를 중임하여 대업을 망치고 말았는데, 이 같은 양자의 차이는 다카시마 도시오의 말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지. 유비는 생전에 적어도 전쟁에 관련해서 만큼은 제갈량을 철저히 외면했었는데, 이것이 그 이유의 전부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어느정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
▲ 연의 속 유비는 마냥 감성팔이나 시전하는 좆밥이었지만, 사실 그는 천하의 조조도 두려워한 '영웅'이었어.
이처럼 제갈량의 군사적 무능함은 그의 북벌 전반에 걸쳐서 계속해서 드러났어. 사실 그의 군사적 행로는 '무능' 그 자체로 보일 지경이지.
'해마다 무리를 움직이고도 아직 능히 공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응변의 장략이야말로 그의 장점이 아니었을까?' 이것이 군사가로서의 제갈량에 대한 진수의 평가다. 한껏 호의적으로 말해서 그 정도였던 것이리라.' (다카시마 도시오 저 '삼국지 오디세이' 中)
'전쟁에 서툴렀지만, 위대한 인물' (고이데 후미히코 저 '삼국지 인물사전' 中)
'따라서 공명은 원래 전략가는 아니며, 임기응변의 능력이 없다는 평이 나돌았다. 확실히 그대로였다고 생각한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중국 중세사' 中)
'그렇다고 해도 군대를 움직여서 공을 세우는 것에는 능숙하지 않다. 대체로 변화에 대응하는 장수의 지략은 모자라지 않는가.'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中)
대체로 제갈량의 군사적 역량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은 것이 현재의 사학계야. 반대로 공명의 군사적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은 열악한 국가 환경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해나간 그의 모습에 동정과 연민에 근거한 것이지, 그의 군사적 역량 자체를 뛰어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맞아. 그의 역량이 이러할진데 위연의 계를 거절한 제갈량의 판단을 무조건적으로 최선의 판단으로 보는 것은 위험한 견해가 아닐까 싶어. 그가 자오곡의 계를 거절한 것은 마속을 기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역량 부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 '힝.. 글쓴이는 나 왜이렇게 까기만 하노?' 주제 때문에 그렇지, 공명 자체는 ㅆㅅㅌㅊ니까 울지마라 이기..
자오곡 계책과 비슷한 사례로, 위나라 장수 등애는 양식의 운반마저 끊어지는 최악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700리(약 280KM)의 산악 지대를 돌파하는데 성공하기도 했어. 겨울 음력 10월 11일에 출발한 등애가 검각을 우회하여 강유(江油)에 도달한 것을 감안할 때, 위연의 660리는 비록 포령을 넘는 험준함을 생각한다 하더라도 등애보다 훨씬 우월한 조건에 있다고 할 수 있지. 일단 강유성을 돌파해 면죽으로 진격한 등애는 촉한의 제갈첨을 베고 평토로 진군, 황제 유선으로부터 항복을 이끌어내었어. 당시 촉의 지리에 대해 면밀한 정보를 지니는데 한계가 있었던 등애 조차 가능한 일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준비한 위연에게 유독 불가능하다고만 하는 것은 누가 봐도 충분히 납득시키는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더불어 촉한에 비해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위나라 조차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우회로를 통하여 전쟁을 조기 종결 시키려고 노력했는데, 하물며 모든 것이 열악하고 식량의 난조로 전쟁의 장기화를 피해야하는 촉나라가 택한 북벌의 전략은 제갈량의 실패가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 조차 들게 하지않아?
▲ 이 몸은 60대의 몸을 이끌고 산길로 진격했다 이기야.. 탁상공론은 이제 그만 NAVER..
3. 제갈량과 위연이 가진 입장의 차이
마지막으로 고려할 부분으로 제갈량과 위연이 가지는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들 수 있어.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모택동의 명언은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적용된다고 볼 수 있지.
들어가기 앞서 미리 몇자 적어보자면, 이 내용은 제갈량이 애초에 이기려고 전쟁을 한게 아니라 촉한의 내정을 위해 전쟁을 했다는 이론으로, 평소 삼국지를 연의 이상으로 관심 두지 않았던 일게이들에겐 다소 충격이 될 수도 있는 부분이야. 그래서 자오곡의 계처럼 리스크가 있는 작전은 굳이 실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 최근에는 중국의 권위있는 삼국지 학자 이중톈 교수가 자신의 저서인 '삼국지 강의'를 통해서 국내에 소개하기도 했으니 관심 있는 게이들은 꼭 읽어봐라.
'원정(남정)에서 돌아오자, 공명의 촉나라에서의 지위는 더욱 강대해져 있었다. 그는 그 때까지는 단지 문관으로서의 재상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 병권을 장악하여 무장으로서도 충분히 자격이 있음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권력이 강대하면 할수록 그는 움츠러들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어떤 유언비어가 떠돌아 그 때까지의 숱한 고생이 하루아침에 수포로 돌아가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터무니없는 의혹을 받지 않도록 경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선왕 유비의 유언(북벌)을 가능한 한 빨리 실행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중국 중세사' 中)
'공명이 싸우는 모양을 살펴보면, 처음부터 이기는 싸움이 아니고 지지 않는 싸움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리야 히로시 저 '삼국지 인물여행' 中)
▲ 당시 촉나라는 똘똘 뭉친 것 같아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내부에서는 암투와 음모로 가득하고 반란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던 굉장히 불안한 형태였어. 유비가 지방 호족들을 힘으로 억누르고 세운 왕조였기 때문이지. (이 내용도 하나의 주제로 다룰만큼 심도 있는 내용이니, 이런 짤방 주석으로 대체할게!)
제갈량은 확실히 유비 생전에 군사에 관련하여 철저히 외면 받았어. 그런 그가 유비 사후, 남정을 이끎으로써 병권에까지도 자신의 세력을 뻗쳐나갔음은 사실이나, 그 한번의 군사 행동만으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지. 이에 그는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고, 동시에 군 권력을 확실히 장악하기 위해 북정을 획책하기에 이른 것이야.
따라서 제갈량에게 따르는 가장 큰 군사적 의혹, '전쟁은 어차피 투기이다. 어느정도 위험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가 위연의 계를 거절한 것은 그의 잘못이지 않은가?'의 원인은 실상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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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시 제갈량의 행로는 위나라에서 권력을 키워나가던 사마의와 대단히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에 더욱 흥미로워.
'촉의 제갈공명이 수차례에 걸쳐 섬서로 침입해 왔을 때, 오로지 그 방어에만 전념한 것이 사마의였다. 그가 진지를 구축하고 만전의 방어책을 취해 굳이 결전을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위나라 내부에서 자신의 지위보전을 숙고한 때문이었다. 즉 당시 그에게 있어서는 가능한 한 오래도록 촉군과 대치하고 그러는 사이에 가능한 한 많은 군대를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였다. 촉의 공명은 방심할 수 없는 강적이라며 위의 조정을 협박하여 많은 군대를 보내게 함으로써 군인과의 사이에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두었다. 또 군사비의 일부를 가로채 그것으로 조정의 동료를 매수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자연히 그의 권력은 증대되어 갔다.' (미야자키 이치사다 저 '중국 중세사' 中)
확실히 사마의는 제갈량과의 오랜 대치 기간을 통해 자신의 군 권력을 강화시켜 나갔어. 사마의에게는 촉군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보다는 그저 오래 대치하여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방편으로 사용했다는 것이지. 이러한 점이 제갈량에게도 유사하게 보여진다는거야. 제갈량이 1차 북벌에서 실패한 뒤 스스로의 지위를 격하시킨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벌의 실패는 그 자신에게도 충분한 위협이 될 소지가 다분했어. 때문에 제갈량은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안정적으로만 나아갔던 것으로, 이것이 그가 가지고 있는 딜레마이자 한계였지. 1차 북벌 이후로 제갈량의 군대 운용은 더욱더 조심스러워졌는데, 확실히 이기기 위한 싸움보다는 지지 않는 싸움을 했다는 것이 분명해보여.
그 결과 비록 수차례에 걸친 북벌에서의 외적 성과는 미미했지만, 내적으로 그 자신의 세력 강화에는 크게 이바지했지. 오래도록 북벌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그는 결국 병권마저 대부분 장악하게 돼. 유비 사후 제갈량과 함께 고명대신으로 임명되었던 이엄은 처음에 강주를 중심으로하는 파에 세력을 심는데 주력하여 제갈량과 권력을 나누려고 시도했지만, 오랜 북벌로 권력이 제갈량에게 집중되자 이엄도 별 수 없이 제갈량에게 굴복하여 나중에는 쉽게 제거되고 말지.
▲ 제갈량 vs 사마의. 그들의 대결은 관중에서 서로 대치만하면서 내적인 이득을 챙겼던 일종의 '윈-윈 게임'이라고 볼 수 있어. 차이가 있다면 제갈량은 촉한의 미래를 위해서, 사마의는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 아니었을까?
계속되는 북벌로 제갈량에게 권력에 지나치게 집중되고 말았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로서 230년, 위연에게 가절이 주어진 것을 들 수 있어. 이미 오래전부터 북벌의 총수인 제갈량이 가절을 가지고 있었던 데다, 위연이 어떠한 별도의 임무를 받았던 기록도 없었으므로 위연에게 정서대장군으로의 승진과 함께 부여된 가절은 안그래도 위연을 부리기 어려웠던 제갈량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을거야. 그리고 이는 20대 중반으로 접어들던 후주 유선이 지나치게 비대해져가는 제갈량을 견제하기 위해 위연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
'건흥 12년(234)에 제갈량이 북곡구(北谷口)로 출병하자, 위연이 선봉이 되었다. 제갈량의 진영으로부터 10리 떨어진 곳까지 나간 위연은 머리에 뿔이 나는 꿈을 꾸었다. 꿈 해몽가인 조직(趙直)에게 묻자, 조직은 위연을 속이며 말했다. "기린은 뿔이 있지만 쓰지 않습니다. 이것은 싸우지 않고 적군이 자멸하려는 징조입니다." 조직은 물러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각(角)이라는 글자는 칼(刀)아래에 쓰였습니다. 머리 위에 칼을 쓰고 있으므로 매우 불길합니다."' (삼국지 촉서 위연전 中)
위 사료는 북벌이 종반으로 치닫던 234년에는 이미 조직과 같은 과학자(?)들마저 제갈량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 있었음을 나타내준다고 볼 수 있어.
이 같은 점들은, 제갈량이 북벌을 수행해나가면서 그 자신의 권력을 증대시켜 나갔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어. 비록 제갈량의 이해할 수 없는 북벌의 모습을 통해, 17세기의 대학자 왕부지를 비롯한 일부 논객들은 '이공위수(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를 생각해 내었지만, 근래에 들어 중국과 일본의 사학계에서는 젊은 학자들을 주축으로하고 있는 이공위수를 부정하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어. 비록 좆문가이지만 나 역시 이공위수를 부정하는 편인데, 공명의 북벌을 이공위수의 논리로 보기에는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야. (자세한 내용은 생략!)
또한 제갈량이 무도와 음평을 공략한 것 역시 이러한 정치적 맥락과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돼. 무도와 음평을 점령함으로써, 위가 우회하여 촉을 급습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고 보여져. 왜냐하면 그런 방어적 요소가 성립하려면 그 지역에 촉한의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인데, 후일 등애의 습격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나듯이 이 지역에 대한 촉의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었어. 더군다나 무도 지방은 원래 한인보다는 강족들이 사는 지역이었는 데다 강족과는 대립보다는 화합의 노선을 택했던 촉한으로서는,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 시설을 두는 것이 강족들에게 불안감을 줄 우려가 있기에 점령의 의미가 거의 없는 지역이라는 것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이 땅을 확보함으로 인해 북벌의 실패로 스스로 격하하였던 지위를 되찾게 돼. 일종의 정치적인 쇼라고 생각할 수 있지. 1차 북벌에서 본인의 실책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얻은 데다가, 2차 북벌에서도 물자만 허비한 채 막을 내렸으니, 여론을 다시 재조정할 필요가 있었던거야.
▲ 제갈량, 그의 정치적 재능 만큼은 고금을 관통하는 천재라고 볼 수 밖에 없을거야.. ㅆㅅㅌㅊ 짝짝짝짝..
▲ 위연,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자오곡 계책은 그나마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여겨졌을 것이다.
이후, 조상의 남진을 저지함으로 인해 제갈량의 촉한에서의 입지는 가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지. 제갈량처럼 정치적 딜레마를 계산할 필요 없이 오로지 전쟁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하였던 위연과 달리, 제갈량은 촉한의 내정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인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는 거야. 때문에 제갈량은 위연에 비해 자오곡 계책을 위험하게 보았던거야. 선주로부터 이어져온 중원으로의 열망은 촉한의 국가 방침이었다는데는 이견이 없어. 국운을 걸고 이루어졌던 북벌에서 오로지 승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지에 뛰어들고자했던 위연과, 국가의 총수였기에 소극적이고 안정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던 제갈량. 제갈량은 자오곡 계책이 실패와 성공 시의 정치적 변화 모두 다 만족스럽지 못했을거야.
분명 자오곡의 계는 전술적으로 대단히 높은 완성도를 가지고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으로부터 기각 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중에와서 그 가치가 크게 훼손되었고, 위연의 장엄한 의기마저도 필부의 객기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어. 그게 내가 이 글을 쓴 이유이기도 하고.
위와 촉, 피아의 역량 차이는 명백했어. 전쟁은 타이밍이지. 한중을 제압한 조조가 사마의와 유엽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촉으로의 침공을 포기했던 것은 유명환 일화야. 그러나 조조는 불과 열흘 후에 유엽에게 촉을 칠 것을 물어보지만, 이번에는 유엽이 촉 공략이 무리라고 말한 것은 전쟁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 10일 전에는 촉을 취할 수 있었지만, 10일 사이에 촉의 방비가 공략 불가의 수준이 되버린거야. 강대했던 조조가 타이밍을 놓쳐 촉을 포기해야만 했다면, 하물며 약체인 촉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타이밍을 노려야했어. 확실히 1차 북벌은 촉에게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어. 관중을 책임져야할 하후무는 무능하며 그 소재조차 불투명한데다, 옹주자사 곽회 역시 그저 자신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했고, 3군의 반란을 평정한 것 또한 조진이 하후무를 대신하여 관중으로 온 이후에 진압에 나섰던 것인데, 그만큼 옹량에 사람이 없었고 방비가 허술했다는 것은 리얼팩트가 아니고 뭐겠어? 그러나 위의 본대가 장안에 입성하고, 체제와 진용을 정비한 위의 군대 앞에서 촉한이 군사적으로 승리를 거둘 방법은 사라지게 되는거지.
물론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북벌의 가능성이 대.단.히 희박한 것은 사실이야. 그러하기에 북벌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오늘의 제갈량이 되었던 것이겠지. 그러나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가 만약 위연의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면 북벌의 낮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졌으리라고 확신하는 바야.
나는 이 글을 이렇게 이상의 네 문단으로 결론 내리고 싶어. 일베에서 삼국지를 처음으로 다루어보았는데 긴 글 읽어준 게이들 정말 수고했어. 정사에 관심이 없었던 일게이들은 충격도 많이 받았을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남은 시간 동안 다른 주제로 찾아올 수 있으면 찾아오도록 할게!
(& 장안 공략 파트처럼 설명이 조금 부족한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쓰다보니까 길이 노무노무노무노무 길어져서 너무 힘들었다.. 궁금한 점 있으면 덧글 등을 통해 최선을 다해 답변해줄게. 그리고 이상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가 섞여있으므로 일부 정사충들의 경고처럼 주의가 필요로 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