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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생긴 아재야. 한국 이름은 박경재고.

 

1948년, 일본 오사카에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 아버지가 건설업을 하셔서.

근데 후에 회고한 내용에 따르면 "자신은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라고 술회하고 있어.

 

더구나 당시 박경재의 국적인 '조선적'은 사실상 무국적이나 다름 없어서, 일본, 북한, 남한 모두가 조선적을 외면했어.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 탓인지, 박경재는 조선적에서 일본으로 16세 때 귀화해. 그래도 조선인이라는 딱지는 평생 그를 괴롭혀. 이 때 새롭게 얻은 이름이 아라이 쇼케이야.

 

박경재는 한국인이라는 꼬리표를 공부로 극복해보려고 했는지 도쿄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그리고 잠시 신일본제철 (우리나라로 치자면 포스코)에 입사해서 기술자로 일하다가, 대장성 (재무부)의 관료로 입성하게 돼.

 

이 때 그를 눈여겨본 인물이 있었는데...

후에 부총리까지 지내는 인물인, 와타나베 미치오야. 4년 넘게 총리를 지내서 "대통령형 총리"라고 불리고 지금도 살아있는 나카소네가 일선에서 은퇴하고나서 파벌 좌장을 물려받았을 정도로 유력인사였지. 건강이 안좋아서 한국나이로 일흔 둘에 뒤지기는 하는데...

 

이 때 와타나베에게는 큰 딜레마가 있었어. 직설적인 발언으로 대중적 이미지는 좋았는데 당시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자신의 파벌이 지지하지 않는 후보에 투표하고 파벌에서 탈퇴해.

 

일본 정치인들의 등용문이자 집 같은 공간이 파벌인데 이러한 파벌이 없는 상태에서는 총리는 커녕 공천마저 위태로운 것이 당시 일본 정치의 현실이었으니까 와타나베 입장에서는 젊은 인재들을 발굴해서 와타나베 개인의 힘으로 그들을 공천시켜서, 의원이 된 젊은 인재들을 대동하고 자신의 원래 파벌로 복귀하는 것만이 그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어.

 

이 때 대장성 관료에다가, 일본인 치고는 잘생긴 생김새에 (핏줄은 한국인이었으니까), 젊은 나이까지 갖춘 아라이 쇼케이는 와타나베의 눈에 들었지.

 

결국, 1983년 총선에서 아라이는 와타나베의 힘으로 자민당 공천을 받고, 도쿄 2구에 출마해.

 

1996년까지 일본은 하나의 선거구에서 여러 의원이 당선되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도쿄 2구는 쟁쟁한 인물들이 모여 있었던 동네였어. 주요 인물들을 말해보자면 이시하라 신타로 (최근까지도 정계에서 활동했고, 당시는 국회의원이었어. 자민당 소속), 우에다 데쓰 (NHK 노조 출신으로 사회당 소속이었어. 대중적 인기도 높았음), 오우치 케이고 (일본의 제 3야당이던 민사당 위원장)와 어느 지역에서든지 10% 정도의 고정표를 가졌던 공산당 후보가 있었지.

 

이런 거물들 틈새에 끼여서, 아라이는 초반에 선전해. 그러나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시하라 신타로 진영에서 아라이의 포스터에 "북한 출신"이라는 검은 스티커를 붙이는 짓을 해. "검은 씰 사건"이라고 불리는 일인데, 일본어되는 애니충 일게이들이 찾아봤으면 한다. 거기에 조간신문에서도 아라이의 경력을 표시하고 맨 밑줄에는 "조선적에서 귀화"라고 쓰는 등, 당시 일본인으로써는 치명적인 약점인 한국계임을 숨기지 않고 기재해.

 

그 결과, 4명을 뽑는 선거구에서 5위로 낙선하는 좆같은 처지가 돼... 그래도 아라이는 다음 선거를 위해서 지역구를 꾸준히 관리하는 근성을 보여줘.

 

결국 1986년 선거에서는 지난 선거에서 자신을 낙선하게 했던 주범인 이시하라 신타로를 1000표 이내로, 턱 끝까지 위협하는 2위 득표로 초선에 성공해. 그리고 1990년과 1993년에도 자민당 소속으로 계속 당선되면서 아라이는 명실상부한 도쿄 2구의 터줏대감이 돼.

 

그러나 1995년, 그의 정치적 후견인인 와타나베 미치오가 사망해. 이런 상황에서 아라이는 지역민들의 사랑으로 1996년, 첫 소선거구제 선거에서 무소속 출마에도 불구하고 오우치 케이고를 누르고 1위로 당선이 되는 기염을 토했어. 물론 당시에는 이시하라 신타로가 잠시 정치활동을 중단한 상태이긴 했지만...

 

그러나 후견인 없는 그의 정치생활을 순탄치 않아. 결국 1997년, 정치인들의 증권 차명거래 문제가 불거지자 일본 주류 정계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던 아라이 쇼케이를 제물삼아 자신들의 안정을 도모해. 그리고 1997년 12월 어느날, 그의 체포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했어.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준 국회의원은 히로시마 출신의 가메이 시즈카 뿐이었어. (가메이의 훈훈한 일화는 이것 이외에도 많아. 전공투 호로새끼들이 개판친 사건으로 유명한 아사마 산장 사건의 위령제에도 꼬박꼬박 참석하는 등..., 당시 가메이가 경찰 공무원이었거든)

 

그 날 저녁, 국회의사당을 빠져나온 아라이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호텔로 향한 다음, 자신의 부인을 불러 그 호텔방에서 투숙하고자 했지. 그리고 그의 부인이 위스키를 사러 빠져 나간 사이에, 그는 오래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직도 이런 좁은 나라에 있나, 더 넓은 곳으로 다시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자살을 선택해. 사실 그가 자살을 한다는 것에 대한 암시는 체포동의안이 통과되기 전 "최후의 진술"이라는 말로 알 수 있기도 했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갓본이라면서 찬양받고 있지만, 급식충도 아니고 국회의원들끼리 사람 한 명을 한국계라는 약점을 잡아 자살까지 몰고 간 것은 분명히 일본이라는 사회가 폐쇄적이고 문제가 있다는 증거겠지. 일게이들도 일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줬으면 좋을 것 같아 올리는 글이야. 일베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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