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동경대공습에 대해서야.
일주일전에 이오지마 전투를 올렸는데, 게이들이 의외로 태평양전쟁에 대해 관심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럼 시작할께.
동경대공습이란, 2차대전(태평양전쟁)말기, 미군에 의한, 동경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통칭하지만, 일반적으로는 1945년 3월10일에 가해진 특정한 공습을 일컫는 말이야. 인구가 밀집한 도시를 무차별 집중 폭격을 가하여 민간인이 큰 피해를 입은 사건으로 인류역사상 최대규모의 피해가 발생한 사건이야.
물론 근본적인 원인제공은 일본이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
<미국의 폭격계획>
미국은 전쟁을 신속하게 종식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일본본토에 대한 폭격을 계획해.
넓게 펼쳐진 전장의 최전선에서 일본군과 직접 살을 맞대고 전투를 하다보면 미군의 전투병도 죽거나 다치게 되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도 미정부에게는 크나큰 압력으로 작용했어.
이에, 본토에 대한 폭격계획을 세우는데,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방법일까를 고민하는 와중, 1943년2월15일자 미국경제전쟁보고서[일본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의 경제적 의의] 라는 보고서가 나와. 여기에는 폭격대상도시의 선정을 위한 인구밀도, 화재위험도, 수송기관과 공장의 배치 등을 기준으로 폭격유효도를 알 수 있는 일람표가 등장한다.
이 일람표는 특히 인구밀도를 중시하여 동경 각 구를 인구밀도로 표시한 지도도 첨부되.
>> 최유효지역:도시중심부 상업지역, 주택과 공장의 혼재지역 밀도: 91000명/1평방마일 (동경인구의 25%)
>> 유효지역2 :항만시설, 창고 등도 있는 주택지역 밀도: 54000명/1평방마일 (동경인구의 46%)
>> 비유효지역:상기지역외, 변두리의 주택지역, 방화설비가 잘 정비된 오피스지역
또 미군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시의 화재에 의한 피해실태를 철저히 검증하여, 목조주택이 밀집한 동경중심의 상점가와 주택가가 화재피해를 크게 입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지.
이러한 결과를 폭탄의 선정과 공격목표의 결정에 반영하여, 동경대공습의 피해지역과, 규모는 관동대지진의 화재피해지역과 거의 일치하게 되는데, 이는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지.
<개발>
미군은 일본의 가옥을 재현한 실험장을 만들어서 대규모의 연소실험을 실시해.
실험용 일본가옥은 하와이의 일본계 이민자들을 불러 들여 방안의 다다미까지도 똑같이 만들어 배치해. 이러한 연구와 실험을 토대로 클러스터소이탄개발의 참고가 되어 동경대공습에서 기대했던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하게 되지.
<동경 폭격>
1944년 11월, 헤이우드 한셀준장의 지휘로 시작된 일본본토 공습은, 군수공장, 정유소 등 만을 목표지점으로 하는 것이었어.
왜냐하면 한셀장군은 비전투원인 일반시민까지 공격하는 무차별폭격에 대해 비인도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전장의 최전선에서 적과의 교전을 통한 승리는 미군측에도 큰 인명피해가 발생하기에, 그것을 피하고 조속히 항복을 받아내는 방법은 민간인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는 무차별폭격이 미군으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작전으로 1945년 1월 21일 부임한 커티스 르메이(Curtis Emerson LeMay)소장은 방침을 크게 바꾸어 대규모의 무차별 공격작전을 입안하게 되.
※커티스장군은 전쟁 후 미국 제5대 공군참모총장이 된다.
하지만 작전내용에는 아래와 같은 문제가 있었어.
1. 고도 7000~8000피트의 저고도에서 소이탄을 투하한다.
→ 상공의 강풍을 피해 탄착정밀도를 높일 수 있으나 방공포와 일본전투기의 요격을 받을 수 있다.
2. 1회 폭격시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기총을 떼어내고 탑승원을 줄여, 소이탄의 탑재량을 늘린다.
→ 일본의 요격기와 조우해도 반격할 수단이 없다.
르메인장군이 입안한 작전중 저공비행에 대해 병사들이 난색을 표하자 르메인은 "뭐가 되었건 낮게 날아라..이 공습이 성공하면 전쟁은 곧 끝난다."라고 윽박질러 병사들을 설득하게 되. 병사들도 전쟁이 빨리 끝난다면.. 이라고 생각하고 작전에 참여하게 되.
1945년 1월 27일부터 B-29를 이용한 민간인을 배제하지 않은 공습이 시작되지만 대규모의 공습은 아니었던지라, 사망자는 1회폭격에 수백명 선에 머물렀어. 이러한 단발적인 소규모 공습은 3월7일까지 이어지며 그 빈도는 대략 3일에 한번씩이었어.
<동경대공습>
※사이판 이즈리공항의 B-29출격전 사진
운명의 날, 3월10일. 인구가 밀집한 주택지역에 대한 대공습이 시작되.. 작전명은 미팅하우스 2호 작전.
고도 1600~2200미터의 초저고도 & 야간 & 소이탄 집중투하를 대규모로 진행하는 첫 공습이었어. 저 위에서 설명한대로 목조가옥이 밀집한 시가지를, 또 주택가에 혼재하고 있는 공장을 완전히 불태운다 것이 작전의 목표였어. 미군은 훗날, 이 공습에 대해 "일본의 중소기업이 군수산업의 중심이었고 위치는 주택가 였다"라고 설명하지.
아무튼, 미군의 참가부대는 제73, 제313, 제314항공단으로 325기의 B-29폭격기가 출격했어.
각 폭격기는 모든 기관총과 탄약을 제거하고 소이탄의 탑재량을 최우선시하여 통상의 약 2배인 6톤의 고성능 소이탄을 싣고 출발하게 된다. 이 공습에서의 폭탄의 투하탄량은 38만1300발. 1783톤에 이르렀어. 또 위에 언급한대로 사용되는 소이탄은 당시의 일본가옥을 태우는데에 최적화되도록 개발된 것이었지.
저공진입이라고 불리는 비행법이 처음 대규모로 실전에 도입되었는데, 먼저 투하유도기가 선행하여 초저공에서 엘렉트론소이탄을 투하하여, 뒤를 따라오는 본대에 공격구역의 정확한 위치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어. 그리고 본대의 폭격기 편대도 통상보다 저공으로 침투하여 발화점을 확인하고 그 지역 집속소이탄 E46을 집중적으로 투하하는 방법을 썼어. 이 방법은 고공에서의 폭격보다 훨씬 높은 착탄정밀도를 보여주게되.
미군이 3월10일을 작전일로 잡은 이유는, 미군의 정보에 연소효과가 높은 바람이 강한 날이었기 때문이야.
혹자는 일본의 육군기념일이 3월10일이기 때문이라는 말도 하지만, 미군내의 문서에는 이런말이 등장하지 않는 걸 보아 추측에 의한 주장이라고 보여.
3월9일 밤.
미군편대가 수도권 상공에 접근해. 일본군도 그 움직임을 탐지하여, 일본시간 22시30분에 라디오방송을 중단하고 경계경보를 발령해. 하지만, 미군기가 이전의 공습과는 다른 경로로 들어온 것을 잘못 분석하여 "적기는 퇴각중"으로 오판하고 경계경보를 해제하고 말지.. 이건 정말 치명적이었어.
그리고 동경도민이 아무 걱정없이 무방비의 일상으로 돌아가 잠을 청하는 자정무렵(10일 0시 7분) 폭격이 개시되.
325대.
하늘을 뒤덮은 B-29편대는
제1목표 코오토오쿠(江東区)
제2목표 스미다쿠(墨田区)
제3목표 다이토오쿠(台東区)
제4목표 츄우오우쿠(中央区)를 차례로 불바다를 만들어 버려.
공습경보가 발령된 것은 초탄투하되고 8분이 지난 0시15분이야. 경보가 늦어진 이유는 당시 강한 계절풍으로 방공레이다의 안테나가 크게 흔들려 정밀도가 떨어진나머지 미군기 편대의 파악에 지장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0시20분부터는 미나토쿠(港区)에도 폭격이 시작되고, 미국이 목표로 한 동경의 인구밀집지역 전역에 폭격이 진행되.
일본쪽 자료에는 미군기는 달아나는 시민의 무리에 대해서도 기총소사를 하였다고 되어있지만, 미군의 작전보고서에는 그런 내용은 확인되지 않고 있어. 단, 화재의 연기로 목표가 보이지 않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동쪽에서 부터 공격하라는 지시가 나와 있었고 그에 준하여 폭격은 진행되었어.
<결과>
이 공습으로. 단. 단 하루만의 공습으로 동경의 東반부. 동경의 1/3에 해당하는 41만평방km가 완전히 불에 탔어.
그리고 경시청이 조사하여 발표한 피해는 다음과 같아.
○사망: 83,793명
○부상자: 40,793명
○피해주민:1,008,005명
○피해가옥:268,358채
※ 불에 탄 모녀의 시신, 아이를 업고 뛰었는지 등은 불에 타지 않았다
※ 시신을 조사하는 경관
하지만, 실제사망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아 10만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야.
부상자도 11만이상일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최근 민간단체와 신문사가 조사를 한 결과, 가족 모두가 몰살당하여 실종상태가 되었던 건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동경에 있던 외국인(조선인 등)은 집계에서 빠져있어 대략 10만명가량이 사망했다고 봐야한다는 거지.
사망자가 8만3천이던 10만명이던, 3월10일 하룻밤의 단독공습에 의한 희생자수는 전세계 전쟁역사상 최대이고 이 기록은 깨지기 힘들거야.. 그리고 그후로도 B-29에 의한 대규모 무차별 폭격은 지속적으로 행해지나, 일본군은 결연히 본토결전을 준비하지. 8월 원자탄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이만 마칠게.
긴글 읽느라고 수고했다.
<세줄요약>
1. 도시의 1/3과 8만명을 태워죽인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공습
2.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3. 전쟁역사는 승자의 논리로 해석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