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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막바지. 일본군은 정유재란이 터지고 북상을 하며 죽산까지 진격했다가 히데요시의 명령과 보급 추위 문제에 명량해전으로 인해 서해의 제해권까지 잃자 한양 공략을 포기하고 남해안 일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기 작전에 돌입힌다.(간혹가다가 짱개들이 직산전투 때문에 철수했다 이런 개소리하면 거르면 된다.)
사천성 전투가 벌어진 사천왜성의 상상도
1598년 9월 18일 조명연합군은 사천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진주로 향함.
당시 사천성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 장수는
시마즈 요시히로
시마즈가 지키는 사천왜성에는 일본군 7000명이 주둔중이었고
시마즈를 잡으려고 동일원이 이끄는 명나라군 3만6000명과 정기룡이 이끄는 조선군 2200명이 사천왜성을 포위함
그러나 시마즈가 이끄는 일본군은 짱개와 조선군의 공격을 전부 격퇴해버림.
시마즈는 짱개의 인해전술에 조총과 지뢰러 성공적으로 방어함. 거기다가 일본군은 조명연합군 식량창고도 태워버려서 괴롭힘.
그래도 짱개의 인해전술로 인해 성이 함락할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대포 과열로 인해 조명연합군 진영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우왕좌앙하는 짱개를 시마즈가 성 밖으로 나와서 도륙해버림 짱개와 조선군은 3만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함.
훗날 시마즈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을 죽이고 고니시를 탈출시키고
세키기하라 전투에서는 1600명으로 10만명의 도쿠가와군을 돌파해서 탈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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