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vs 서양 글 보다가
"몽고제국이 유럽에서 회군한 건 칭기즈 칸이 급사해서 회군해야 했다"
"유럽의 지형은 몽고군의 기병에 적합하지 않은 싸움터다"
"실제 유럽과 몽고가 전쟁을 했으면 몽고가 처발렸다"
"유럽은 미개해서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등의 주장들이 난무하니 그 의혹을 파해쳐봐야하지 않겠나
1. 칭기즈칸 ( 1162? ~ 1227)
요게 칭기즈 칸이 생전에 정복한 영역이고
칭기즈 칸은 유럽은 가 보지도 못하고 죽었어
그래도 역사상 개인이 정복한 영토크기 1위 ㄷㄷ
칭기즈칸은 1227년 서하 ( 현재 몽골과 중국의 남쪽 국경지역)을 정복하다가 진중에서 죽어
2. 몽고군의 서방정벌
1227년 칭기즈칸이 죽고 나서 칭기즈칸의 아들들이 그 정복사업을 이어가는 데,
칭기즈칸의 아들은 나이 순으로
주치 (출적) , 차가타이 ( 찰합대) , 오고타이 ( 와할대 ) , 투루이 ( 타뢰 ) 4명이 있었어
괄호 안의 이름은 한자로 읽었을 때, 5,6,7,8,9 남도 있고 딸도 있지만 생략
애네들이, 특히 그중에 장남 주치가, 1237년부터 러시아 정벌을 시작해서 40년간 서방정벌을 이끌고
우리에게 익숙한 유럽국가 독일, 헝가리와 전쟁을 한 건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 야
바투가 나중에 '킵자크 한국'을 세우지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
3. 몽고군과 맞선 헝가리 독일(신성로마제국) 연합군
몽골군의 유럽원정군은 헝가리방면과 독일 방면으로 두가지로 나눠졌는데,
독일방면은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 ( 바투한테 5촌)가
헝가리 방면은 위에 설명한 바투가 이끌어
당시 헝가리는 "교황성님 도와줍쇼, 십자군 보내줍쇼"
하는데
그 때 교황인 그레고리오 9세(재위 1227~1241)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재위 1212~1250) 랑 트러블이 있었어
몽고군 침략이 있기 전, 이슬람세력에 대한 십자군 정벌에 있어서도
프리드리히 2세가 "교회ㄴㄴ 난 십자군 안 보내" 하면서 교황의 속을 긁어놨지
오히려 이슬람 아이유브왕조의 "알 카밀"과 친하게 지내면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직을 파문당하기도 해
그래서 몽고군이 처들어와서 다 죽게 생겨
프리드리히는 "이러다 다 죽는다. 빨리 십자군 모아서 요격 ㄱㄱ "해도
교황은 " 아 뭔 말탄 야만인들한테 쫄아서 그래 넌 황제도 아니잖아 ㅉ" 이런 식
(프리드리히는 이슬람과 교류하면서 이미 몽고군의 강력함을 알고 있었단다 깨어있는 임금 ㅅㅌㅊ?)
결국 교황과 황제가 서로 견제하는 동안 바투는 헝가리의 왕에게
보잘 것 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하라
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고 15만명의 기병을 이끌고 폴란드의 슐레지엔지방에 도착해 (1241년 4월)
4. 리그니츠 전투
4월 19일 폴란드와 헝가리의 제후들이 실레지아 제후를 중심으로 모인 5만명의 연합군과 신성로마제국의 기사단이 합쳐 레그니치 ( 리그니츠 또는 와르슈타트) 에서 맞서 싸워
독일 - 헝가리 연합군은 중장갑의 기사단이 주 전력이고 나머지는 정규보병도 있었지만 농민으로 구성된 보병대도 있고
정리하면 기사단 뿐인 잡군 이었지
몽고군은 유럽의 기사 입장에서 보면 변변한 갑옷도 없고 단도나 각궁으로 무장한 몽골 군은 영 구색이 없어보였어
하지만 전군이 기마병이면서 10부대 100인부대 단위 등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특징을 간파하지 못 했던 것 같아.
전쟁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선두 석궁병 사격과 함께 기사단이 돌진하자 경기병인 몽골군 선두가 도망치기 시작했어
경기병이 중기병하고 부딪치면 어떻게 될진 알지?
몽골군이 도망치는 걸 보자 기사중심 개인 성과가 중요한 유럽 연합군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돌격해
어느정도 유럽군 선두를 본진에서 떼어내자 후퇴하던 군대가 말머리를 돌려서 좌 우측 기병들과 순식간에 포위했지
그리고 궁기병들이 사격을 하자 유럽군 선두는 전멸하고 본진의 구원대가 오는 족족 다 몽골군의 화살에 죽고
결국 본진까지 다 털리고 지휘관이던 하인리히는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전쟁이 끝나
-리그니츠전투-
5. 갑작스러운 회군
몽고군은 유럽의 각국이 도저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의 전투력이 아니었지
게다가 그리고리오 9세가 1241년 8월 프리드리히를 파문한 상태로 늙어죽어서
프리드리히가 "나를 중심으로 뭉쳐라" 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어
그런데 마침 칭기즈칸의 대를 이었던 셋째아들 오고타이 칸이 1241년 12월 죽은거야.
징기즈칸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 오고타이 , 투루이 의
각각 아들 바투, 부리. 구유크 몽케 가 있어
이 넷은 모두 같이 유럽원정대로 출발했는 데, 가던 도중 바투랑 부리, 구유크가 싸워서 부리랑 구유크는 돌아가
오고타이가 죽었을 때 바투와 몽케는 유럽에 있었고 바투는 오고타이한테 사랑받고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몽케를
추천하고 몽케를 얼른 카라코람으로 돌려보내
그런데 구유크의 엄마 (오고타이의 6번째 부인) 가 구유크를 황제로 세워버린거야
결국 구유크가 칸이었던 3년동안 바투가 유럽원정을 중지하고 몽케를 지원하러 회군하고
1248년 구유크가 병으로 죽고 1251년 몽케가 황제가 되면서 일단락 되었지.
1251년부터는 몽고군은 창 끝을 유럽에서 중동으로 돌려 그 덕에 유럽은 한 시름 놓았지
6. 마지막으로
글 쓰면서 참고했던 책의 작가생각을 인용하면서 끝낼 게
몽골에 유럽 정복의지가 있었다면 남은 독일의 콘라트 4세(프리드리히의 아들) 의 군대 쯤 쉽게 격파하고 프랑스의 심장부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ㄹㅇ 몽고군은 서기 1200년대의 풍운아였더라. 첫글이다
의혹
1. 칭기즈칸이 죽어 회군? ㄴㄴ 오고타이가 죽어서 회군
2. 유럽지형에서 싸웠으면 털렸다? ㄴㄴ 몽고가 개턴다
3. 유럽은 미개해서 정복할 필요 없었다? ㄴㄴ 왕위쟁탈전으로 정복에 신경 못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