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쟁 / 군인 / 인물 / 역사 ]
프랑스를 부쉬고 독일의 통일을 이륙한 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최고의 승리 "로이텐 전투" 이야기
안녕 게이들아 세계사 특히 서양사를 공부하다보면 독일 북부의 소국이였던 프로이센이 갑자기 강성해져서 나중에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몰아내 독일을 통일하게 되는데 이를 위한 토대를 만든 왕이라고 한다면 프리드리히 대왕(Fredrick the Great)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아.
(7년 전쟁 이후 늙어버린 프리드리히)
이 프리드리히는 사실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학대 속에 성장했던 아픈 기억이 있어. 사실 아빠가 존나 밀덕이였거든. 얼마나 밀덕이였으면 나라 재정을 탈탈 털어서 프로이센 총 인구 100만명 중 7만명을 병력(여기에는 독일 타 국의 용병도 포함)으로 가지고 이 병사들을 너무나도 아끼는 나머지 전투 자체도 꺼릴 정도였어. 게다가 키 큰 병사들을 따로 빼내서 척탄병으로 엄청난 대우를 해줬어.
이런 밀덕후 아버지를 둔 프리드리히는 소년 시절부터 음악과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감성 풍만한 문학소년이였는데 13살 때 군사 지휘관으로써의 재능을 강요하는 아버지의 폭압에 못참고 친구랑 영국으로 튈려고 했어. 근데 붙잡혀 버려서 프리드리히는 고탑에 감금되고 친구가 참수당하는 것을 눈 앞에서 지켜보게 되지(사실 프리드리히도 군법 재판으로 사형당할 뻔 했는데 휘하 장군과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 황제의 애원으로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살게 됨). 그 후 자기가 좋아하는 취미 생활은 잠시 접어두고 전쟁사와 훈련을 통해 미래의 재능을 발휘하게 될 경험치를 축적하게 돼.
1740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프로이센 왕이 된 프리드리히는 즉위 후 "짐의 최대 관심사는 국가의 안녕을 도모하여 국민 전체가 행복해지는 것에 있다. 짐은 국민이 고통을 받으면서 까지 부강해지고 싶지 않다. 즉, 짐의 이익보다 오히려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다."라는 선언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 유럽 각국은 프리드리히의 아버지 군인왕의 부국강병 정책에서 베를린을 독일의 아테네로 만들려는 프리드리히를 예상하여 쌍수들고 환영하게 되지(하지만 향후 프로이센의 행보는 아테네는 커녕 스파르타가 되어 버림).
즉위 후 몇 달 지나지 않고 오스트리아에서 여성의 황위 상속권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자 바로 독일 동남쪽 체코 위 슐레지엔으로 진군하게 돼. 8년 간의 계승전쟁에서 프리드리히는 군사적 재능과 외교적 수완을 잘 활용하여 슐레지엔을 일단 확보하게 되지. 하지만 프로이센에 대한 패배 후 복수를 꿈꾸게 되는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견원지간이던 부르봉 왕조 프랑스와 외교적 타협을 시도하여 후세에 외교 혁명이라고 일컬어 지는 동맹 결성에 성공, 동유럽의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어 프로이센을 서 남 동 쪽으로 말 그대로 포위망을 구축해 버리지.
(재위 내내 프리드리히와 반목하게 된 마리아 테레지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연합하자 자동적으로 해외 식민지의 권익을 찬탈하기 위해 영국은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게 돼. 하지만 프로이센에 대해 정해진 재정지원만 해주고 병력 지원도 당시 영국의 속국이였던 하노버 지방을 방위하기 위해서만 파견하기로 해서 군사적인 기대는 거의 할 수 없게 되어버렸어. 하지만 가만히 있어봤자 선전포고를 당할게 뻔하다고 생각한 프리드리히는 차라리 교통의 편리함과 땅이 비옥한 작센을 점령하고 작전선으로 삼기 위하여 1756년 8월 작센을 침공하게 돼. 이것이 7년 전쟁의 시작이야.
이 전쟁에 있어서 프리드리히의 전략은 내선의 활용이였어. 즉 베를린(중앙)과 드레스덴(서쪽), 브레슬라우(동쪽)를 본 작전선으로 삼고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 남쪽의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이심적(복수의 후방연락선을 갖는)인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 소수지만 정예병 그리고 프로이센의 적은 요새망(이것은 오히려 프로이센의 장점인 기동력을 발휘하는데 커다란 이익이 됨)을 이용해 각개격파하여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 전략의 취지였지. 작센은 몇 달 못가서 로보지츠 전투의 패배로 완전 제압이 되었어.
그리고 다음 해인 1757년 5월 프로이센은 작센 지방과 슐레지엔에서 각각 분진(分進)하여 체코의 프라하로 진군하게 돼. 체코 지방의 수도인 프라하를 구원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6만명의 병력이 파견되어 역시 동수인 프로이센 군과 맞붙게 되는데 프로이센의 신승으로 끝나게 돼. 하지만 오스트리아 군이 바로 프라하 성으로 들어가서 농성을 하자 공성을 하기에 병력 우위가 없다고 생각한 프리드리히는 철수하게 되지. 하지만 한달 후 슐레지엔 계승전쟁 후 승승장구하던 프리드리히는 프라하 동쪽 마을 콜린에서 뼈아픈 패배를 하게 되어 향후 주도권을 잃게 돼
(콜린 전투. 윗쪽이 프로이센 아랫쪽이 오스트리아-작센군으로, 고지를 선취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에 대해 프로이센 군은 선전했지만 결국 격퇴당하게 됨)
수세에 몰린 프리드리히에게 더욱 커다란 악재가 닥치는데 프랑스의 5만 이상의 대병력이 작센 지방으로 진군 중이라는 소식이였어. 그 해인 1757년 11월 늦게나마 프랑스 군은 작센 지방으로 침입하여 프리드리히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요격할 수 밖에 없게 되어. 하지만 이 전투에서 프리드리히는 믿을 수 없는 기동을 선보여서 2배 이상의 프랑스 병력(5만)을 단 500명의 손실로 격퇴시키는 압승을 거두게 되지. 덕분에 프랑스의 유렵 지역에 대한 전쟁 수행 능력은 사라졌다고 봐도 될 정도였어.
(로스바흐 전투. 빨간색이 프랑스군, 파란색이 프로이센군. 촌락에 막힌 프로이센군의 포진을 눈치채지 못하고 우회기동하려던 프랑스군을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180도 회전시켜 자군을 횡대전형으로 상대를 종대로 포착, 우익 고지의 포병과 중앙의 보병으로 적을 끌어 들이고 예비기병대를 출격시켜 말 그대로 90분 동안 일방적 학살을 벌임)
급한 불을 껐지만 동시에 동쪽의 슐레지엔의 수도 브레슬라우가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탈취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는 곧바로 발길을 돌리게 돼. 로스바흐 전투의 딱 한달 후인 12월 5일, 군신 나폴레옹마저 "모범적이고 결단력에 가득찬 기동'이라는 경탄을 할 만큼의 프리드리히의 걸작 로이텐 전투가 일어나지.
12월 4일 밤 로이텐 서쪽의 삼림 지역에 돌입한 프리드리히는 휘하 장군들을 모아서 연설을 해.
"게이들아. 내일 나는 로이텐 근처 고지에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2배의 오스트리아군에 대해 모든 기술상의 법칙을 무시하고 공격을 하고자 한다 이기야. 이 위기에서 탈출할려면 이 방법 밖에 없노;; 나는 게이들의 경험과 용기 그리고 충실한 신뢰를 믿고서 내일 혁혁한 승리를 거둘 거라고 믿는다 이기야. 만약 적을 격파하지 못한다면 우리 군은 모두 적 포대 앞에서 죽어야 된다 이기야. 전멸을 걸고서 싸우는 거다. 게이들중 한명이라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안다 이기야. 만약 내가 내일 적의 시체를 말발굽으로 넘고서 게이들의 무공을 칭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조국이 나를 대신해 칭찬해줄 것이다 이기야. 부디 진지로 돌아가면 지금 내가 말한 것을 잘 전달해줘라 이기야. 가능하다면 내일 게이들의 행동을 하나씩 하나씩 관찰하고 싶다. 기병으로써 명령을 받아 바로 적에게 돌진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전투 후 즉시 하인을 불러 불침번으로 쫒아 버릴 거다 이기야. 보병으로써 전진을 주저하는 자가 있다면 칼을 뺏고 어깨 위의 견장을 떼어 낼 것이다 이기야. 그렇다면 게이들아 내일 지금 쯤은 승리의 개선이거나 영원한 작별, 둘 중 하나다."
여기서 프로이센의 군주로써의 프리드리히의 진면목이 들어난다고 생각하는 연설이야. ㄱㅆㅅㅌㅊ
5일 새벽 프로이센 군은 슬슬 진지에서 나와 촌락과 구릉을 장애물 삼아 비밀리에 기동을 시작해. 여기서 하나의 양동(기만)을 사용하는데 기병대만을 우선 오스트리아 우익으로 견제 공격시켜. 이는 프로이센 군이 곧 압도적인 정면 화력을 펼치기 위해서 확보해야 할 국부적 병력 수의 우위, 특히 상대 좌익의 기병대를 우익으로 차출시킬려는 목적을 가지고 행한 것이였어. 오스트리아의 지휘관 카를 대공은 프리드리히의 뜻대로 프로이센 군의 주공이 오스트리아군 우익 정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오 쯤이 되자 경악할 일이 벌어져.
카를이 보고 있는 자군 정면에 프로이센의 압도적인 병력이 출현한 것이지. 이 기동은 사선기동의 진수로써 그래픽으로도 구현하기 힘들 정도의 묘기라고 생각될 정도야. 오스트리아군은 프로이센의 주공이 자군 정면이나 우익이라고 생각하여 포대를 그 쪽으로 배치하고 병력도 그 곳을 보게 전개했는데 이렇게 되면 아주 가느다란 실 형태의 종대로 프로이센군과 상대하게 되는 거지.
오후 1시에 공격을 개시한 프로이센군은 적 병력을 하나씩 하나씩 녹여가면서 로이텐 마을로 육박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군 우익에 있던 다운 장군이 이상을 느끼고 급히 병력을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해. 하지만 엄청난 길이의 군대를 완전히 회전시키기에 무려 1시간 30분이 걸리고 오스트리아 군은 어쩔 수 없이 로이텐 마을에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대항하게 돼.
(로이텐 전투 그림)
하지만 병력 회전이 슬슬 완료되자 원체 6만명의 대병력이였던 오스트리아군은 마을을 방벽삼아 잘 대항하게 되고 프로이센군의 기세는 꺾이게 되지. 하지만 여기서 프로이센 정예부대인 척탄병이 중요하게 활용되어 마을의 방어선을 돌파하게 돼.
결국 해가 질 무렵, 오스트리아군은 패배를 깨닫고 동쪽 근처의 슐레지엔 수도 브레슬라우로 퇴각하게 돼. 이 전투에서의 상대 병력 절반이였던 프로이센군의 손실은 6200명 정도로, 오스트리아는 사상 10000명 이상, 포로는 무려 12000명 이상이라는 손실을 입어 다음 해인 1758년 8월 러시아 군이 브란덴부르크 지방으로 칩입할 때까지 오스트리아 군은 별다른 공세를 행할 수 없게 되지. 이 로이텐 전투는 잘 훈련된 프로이센 정예군대와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너지가 합쳐져 이 후의 7년 전쟁의 전황은 물론 훗날의 전쟁사에도 큰 족적을 남기게 돼.
하지만 인구수 200만 정도였던 소국 프로이센의 내선을 활용한 각개격파 전술은 동쪽에서 슬슬 증기기관처럼 접근해 오는 러시아 군에 의해 지속가능성에 큰 타격을 입게 되어 버려. 그 대표적인 전투가 1759년 여름의 쿠너스도르프 전투인데 여기서 프리드리히는 자살까지 생각하게 될 정도의 참패를 입게 돼. 그럼에도 프리드리히는 포기하지 않고 연합군의 불협화음과 전략의 변경(1760년부터는 슐레지엔을 중심으로 진지방어를 주로 행하게 됨)으로 미래에 대한 실날같은 희망을 이어가고 머지않아 이것이 곧 보답받게 돼.
이 글은 여기까지로 하고 싶고 읽어 준 게이들아 수고 많았다 이기야. 즐거운 하루 보내라 이기.
참고한 자료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리델하트 전략론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
위키피디아
戦争史概観(일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