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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오패 순서대로 제환공(齊桓公) 송양공(宋襄公) 진문공(晉文公) 진목공(秦穆公) 초장왕(楚莊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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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의 동천(周 東遷)

 

 

서주 시대 영역

 

서 주(西周)의 건국이 200여년이 지나고 주(周)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제후들을 소집하지 못하였다. 

주의 10대 왕 여왕(王)은 무너져 가는 주의 왕실을 만회해 보고자 

여러 정책을 시도 하였지만 그 제도는 착취에 기반한 폭정(暴政)이었다. 

주 왕실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중국 최초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여왕(王) 체()땅으로 피신하게 된다. 

 

 

주나라 병사 복원

 

주 왕실에 왕이 없자 중국 역사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공화(共和)의 시대가 13년간 열린다. 

체 땅에 피신한 여왕이 죽고 태자 정(靜)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주의 11대 왕 선왕(宣王)이다. 

선왕은 중산보(仲山甫)와 윤길보(尹吉甫)와 같은 명신의 도움을 받아 

서이(徐戎)를 치고 형변(荊變)을 정벌하고 회이(淮夷)를 복속하는 등 

사방의 이(夷)를 교화 시킨다. 마치 성강(成康)의 시절이 돌아온듯 보였다. 

그리고 경제를 발전시켜 주나라의 패업(覇業)을 이루게 되는데 

이를 선왕중흥(宣王中興)이라고 한다. 

 

주의 선왕

 

선왕은 약 47년간 치세 하였는데 그의 말년은 즉위 초와는 많이 달랐다.

그는 패업을 이룬 거에 대해 자만하여 적전(籍田)

(천자가 친히 밭을 갈면서 농민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는 일.)

을 소홀히 하고 사치를 일삼기 시작한다.

기원전 789년 선왕 38년 주는 강융(姜戎)을 쳤지만

천자의 군대는 천무(千畝)에서 대패하고 만다. 

심지어 선왕까지 포로로 잡힐뻔 했다.

 

 

주나라 시대의 전차(戰車)

 

선왕은 이에 분개하여 태원(太原)으로 가 상황을 살피며 강융을 재차 칠 생각을 한다.

중산보등이 선왕을 만류하였지만 선왕은 이를 무시한다. 결국 선왕은 충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강융을 치려 준비하는 도중에 죽고만다.

그리고 그의 아들 궁열(宮涅)이 즉위 하니, 서주의 마지막 왕인 유왕(幽王)이다.

유왕은 본래 노는 것을 좋아하고 정신을 못차리는 씹 병신이었다.

 

 

 

주 유왕

 

미녀 포사(褒似)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 하다 견융(犬戎)의 침공으로

주의 수도인 호경(鎬京)까지 유린 당하고 그의 목숨까지 잃고 만다.

그리고 유왕의 아들인 의구(宜臼)가 즉위 하니 주 평왕(平王)이다.

폐허가 된 호경은 더 이상 수도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평왕은 주의 수도를 호경(鎬京)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긴다.

이를 역사에서는 주의 동천(東遷)이라 하고 이 시기를 동주(東周)시대이다.

 

 

 

 

평왕은 주의 수도를 이동함으로써 주의 부흥을 이루려 했지만 이미

주나라의 힘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고 제후들의 힘은 강력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주 천자(天子)대신 5명의 패자(覇子)가 등장하여 중원의 질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춘추시대(春秋時代)라 한다.

 

(2) 환공(桓公)의 즉위

 

 

문왕과 태공망의 만남

 

제(齊)의 시조(始祖)는 태공망(太公望)이다. 

그는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따라서 상(商)을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의 산동(山東)에 위치한 제(齊)땅의 후작(候爵)으로 봉해진다.

이 후 제나라는 쭉 유력 제후로 주 왕실을 보좌 하다 14대 임금으로 양공(襄公)이다.

 

 

태공망(구글에 치니까 씨발 봉신연의 사진만나오네)

 

양공의 정치는 황음 무도하여 여동생과 근친을하고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황음 무도한 정치를 하였다.

폭정을 일삼는 형을 피하기 위해 이복 동생인 규(糾)와 소백(小白)은

각각 노(魯)와 거()땅으로 피신한다.

 

양공의 정치는 국내에서도 인망을 잃고 반란으로 죽고만다.

반란을 일으킨 공손무지(公孫無知)역시 왕위에 오르자마자 죽고만다.

이로써 제나라의 왕위는 노나라로 망명한 공자 규나 

거로 망명한 공자 소백 중 하나에게 돌아가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소백이 훨씬 유리하였다.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와 소백이 머물던 거()의 거리가 훨신 가까웠기 때문이다.

 

 

 

공자 규와 같이 노나라로 망명한 관이오(管夷吾)는 초조하였다.

그는 혼자 말을 타고와서 소백의 귀국을 막으려고 하였다.

관중은 '공자(소백)께서는 형이 출발 하신것을 아십니까? 

형께서 양공의 장례를 치르러 갈 것이니 굳이 수고스럽게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하니 관중의 친구이자 소백의 스승인 포숙아(鮑叔牙)는 화를 냈다.

'서로의 주인이 다르고 각자 할 일이 있는데 무슨 상관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관중은 돌아가는 척하다 소백을 향해 활을 쏜다.

화살은 소백에게 날라갔고 곧 화살은 소백의 허리에 박히고 만다.

 화살을 맞은 소백은 수레 위에서 쓰러고 관중은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

'이제 제나라 왕위는 공자 규의 것이다'라며 미소를 띄며 규에게 돌아갔다.

 

 

 

하지만 화살은 소백을 맞추지 못하고 소백의 혁대를 맞춘 것이었다.

소백은 화살을 맞을 당시에 기지를 발휘하여 혀를 깨물어 피를 흘리고 죽은 척을 한 것이다.

소백은 영구차에 실려 제나라로 귀국하여 즉위하니 그가 바로 제 환공(桓公)이다.

 

 

 

 

 

 

제나라 왕위에 오른 환공은 재빨리 제나라 군대를 이끌고 

공자 규와 같이 온 노나라 군을 포위한다. 그 곳에서 관중은 잡히고

공자 규는 자살하고 만다. 제 환공은 자신을 쏜 관중을 죽이려 했지만

포숙아가 말리며 '만약 주군이 제만 다스린다면 저로써 충분합니다.

하지만 주군께서 패업(覇業)을 이루시려면 관이오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이로 인하여 관중은 살아나고 환공의 오른팔 역할을 하며 제의 패업을 이루게 된다.

 

 

관중을 변호하는 포숙아

 

(3) 패업(覇業)을 이룬 제 환공

 

 

1) 관중의 개혁

 

 

관중

 

환공은 관이오를 중부(仲父)라 부르며 제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로 올려준다.

(뒤부터 관이오을 관중이라고 부른다.)

그가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 여러가지 정책을 내놓게 된다.

그는 공전제(公田制)를 폐지한 것이다. 

공전제란 땅을 井모양으로 9개로 나누어

8개의 가구에게 수확하게 해 가운데 땅의 수확물을 정부에 바치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더 이상 현실에 맞지 않았고 불합리했지만 아무도 건들지 않았다.

이런 낡은 제도를 관중은 과감히 폐지한 것이다.

관중은 공전제를 폐지하고 징세제(徵稅制)를 도입하였다.

 

징세제란 토지의 단계를 나누어 그 토지에 맞는 등급에 따라 세금을 냈다.

그러다 보니 수확량이 늘어났고 생산은 향상되고 세금의 양도 증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군제를 정비하고 어업가 제염업을 기반으로 전매제를 실시하여 제나라 재정을 부강하게 만들었다.

나라가 부강해지자 점점 인재들이 제나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2) 노(魯)의 정벌

 

 

 

  

제 환공의 첫번째 정벌 활동은 담(譚)이라는 소국이었다. 환공이 거로 망명할 때

그들의 대우가 굉장히 무례했기 때문이다. 뒤이어 규를 도와주는 노(魯)를 쳤다.

노나라 장군 조말(曺沫)은 제나라에 3번이나 패배하였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노나라는 제나라에 영지를 할양 하였는데 환공과 노 장공(魯莊公)이

피를 마셔 맹세를 할 때 조말이 비수를 들고 단상 위로 뛰어 올랐다.

 

 

조말은 비수를 들어 환공을 위협함 '노(魯)는 원래 제(齊)보다 약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혀억지로 땅을 뺏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공(公)께서 군자 시면 저희 노에게 땅을 돌려주십쇼'

이에 조말의 요청에 제환공은 승인 하였다.

 

 

 

환공은 단상에 내려온 뒤에 화를 내며 협박에 의한 약속은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관중은 '제후들에게 신뢰를 잃으면 천하의 도움을 잃게 될 것입니다' 라고

노나라에게 땅을 돌려주라고 간언 하였다.

결국 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라 노에 땅을 돌려주었고 이 행동은

모든 제후국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게 되었다.

 

 

3) 산융(山戎)의 정벌

 

 

 

산융은 현재 요동(遼東)지방에 위치해있다. 그 지역에는 연(燕)이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연은 언제나 산융에게 시달림 당했는데 제나라가 소집한 회맹에 참여하여

패자인 환공에게 도와 달라고 하였다. 제의 군사가 움직이자 산융은 후퇴했는데

관중은 산융의 뿌리를 뽑지 못하면 계속 연의 변경에서 노략질을 할 거라고 말했다.

 

 

 

이에 환공은 군대를 이끌고 산융의 국가 영지국을 토벌하여 연에게 땅을 넘겨준다.

이에 감격한 연 장공(莊公)은 연 국경을 넘어서까지 배웅해준다.

당시 법에서는 제후는 선약이 없으면 남의 제후국으로 넘어가면 안되는 법이 있었다.

제 환공은 연 장공이 제나라 까지 넘어왔으므로 곤란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연 장공이 넘어온 제나라 땅까지 연 나라에 주게 된다.

연 장공은 이를 극구 사양하지만 제 환공은 결국 땅을 주게 되고

연나라의 국토는 수백리 넓어지게 된다.

(후에 전국 7웅에 연나라가 들어간 것은 산융의 땅을 정벌하고 대국이 되었기 때문)

 

4) 계절 존망(繼絶存亡)

 

 

 

당시 패자에게는 이뤄야 할 2가지 업적이 있었다.

그 업적은 바로 존왕양이(尊王攘夷) 그리고 계절존망(繼絶存亡)이다.

존왕양이란 주 왕실을 받들고 사방의 오랑캐를 교화 시킨다는 것이고

계절 존망은 대가 끊겨진 제후국을 도와줘 다시 대를 잇게 만드는 것이다.

 

원래는 주 천자(天子)가 해야 될 업무이지만 춘추시대에 들어서

주 왕실(王室)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였다. 

환공 시절 북적(北狄)이 위(衛)와 형(形)을 침범하였다.

위나라의 임금 의공(懿公)은 죽고 수도는 유린당했다.

형나라도 마찬 가지였다.

 

이에 환공은 제후들을 이끌고 초구(楚邱)와 이의(夷儀)에 성을 쌓고

위와 형을 부활시켜 주었다.

환공은 제나라로 도망온 위나라 공자 벽강(壁疆)을 위의 왕으로 삼으니 그가 위 문공(文公)이다.

 

 

5) 초(楚)의 견제

 

 

초(楚)는 자작(子爵)의 지위로 중원의 제후들은 초를 가르켜 남만(南蠻)이라 부르며 멸시받았다.

이런 초는 무왕(武王)시절 칭왕(稱王)하여 2대를 거쳐 성왕(成王)시절

주변 국을 병탄하면서 초나라는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주변의 국가들을 모아놓고 회맹하여 천자(天子)의 행세를 하니

주 왕실로서는 분통이 터지지만 초를 견제할 제후 들은 아무도 없었다.

 

환공의 비(妃)중 채나라 왕의 딸인 채희(蔡姬)는 장난이 심했다.

하루는 환공과 같이 뱃놀이를 즐기는데 채희가 배를 흔들어서 환공이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이에 화가난 환공은 채희를 꾸짖었지만 채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을 계속하였다.

환공은 채희를 조신하지 못하다하여 채(蔡)나라는 초나라에 채희를 시집보낸다.

 

 

 

이를 빌미로 환공은 송(宋), 노(魯), 진(陳), 위(衛), 정(鄭), 허(許) , 조(曺) 7개국을

규합하여 초나라로 진군한다. 초나라는 강대국 이었지만 제나라 하나도 벅찬데

7개국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굴완(屈完)을 보낸다. 굴완은

'제(齊)와 초(楚)는 서로 인접해 있지 않아 서로 해(害)가 됨이 없는데

어찌하여 임금께서는 저희 초로 오셨습니까?'

이에 환공은

'초(楚)는 본디 주(周)왕실을 섬기기로 맹세했지만 오랫동안 왕실에 순응하지 않았다.

이에 그 죄를 물으려 7개의 제후국과 그대의 나라를 온것이다. 

그리고 예전 주 소왕(昭王)께서 한수(漢水)에 갔다 돌아오지 못하셨는데

이는 초의 책임이다.(주나라 4대왕 소왕이 형초(形楚)를 치다가 돌아오지 못한사건)'

 

 

 

굴완은 주나라에 순응하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소왕의 문제는 강에 가서 직접 물어보라 하였다.

명분은 제나라 한테 있었다. 초의 성왕(成王)은 제나라에 화평을 요청하고 환공이 맹주가 되어

소릉(召陵)에서 평화조약을 맺는다

 

 

 

초를 굴복시킨 제나라는 규구(葵丘)에서 8개국의 제후들을 모아 회맹(會盟)을 맺으니

이것이 규구의 회맹으로 환공의 9번의 회맹중 마지막 회맹이고 가장 큰 회맹이었다. 

그리고 훗날 주 양왕(襄王)이 되는 태자 정(鄭)을 진정한 후계자로 모신다는 맹세를 한다.

(태자 정은 이복동생인 숙대와의 관계 때문에 태자자리가 위협받았었음.

 

(4) 비참한 말년

 

환공에게 3명의 악인(惡人)이 있었다. 한 명은 환관의 시초라 불리우는 수조(竪)

자신의 아들을 삶아 바친 요리사 역아(易牙)

자신의 고국 위(衛)를 버리고 환공 밑으로 들어온 개방(開方)이 있었다.

 

환공은 이들이 자신을 위해서 목숨도 바친다고 생각했지만 

관중은 '수조는 자신의 몸을 해치면서 까지 주공을 섬기는데 자신을 해친다는 것은

남도 해칠 수 있다는 것이고 역아는 자신의 자식까지 바쳐가면서 주공을 섬기는데

사람에게 자기 자식보다 귀한 건 없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영달을 위해 자식도 바치는데

자신의 영달을 위해 남도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방은 부모와 자신이 대를 이을

나라까지 버리고 오는데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주공도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라며 경계를 하도록 하였다. 

 

 

 

관중

 

이 3명이 주변에서 환공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도 관중이 있었을 때는

상관 없었다. 하지만 관중이 죽자 이들은 횡포를 일삼기 시작했다.

관중은 죽기 전 이들을 쫓아 내라고 했지만 환공은 쫓아 낸 뒤 금방 다시 부르게 된다.

 

이들은 자신과 친한 환공의 아들들에게 붙어서 파를 만들어

조정을 어지럽힌다. 그래서 환공이 죽고난 뒤에 서로 난(亂)을 일으키며

제나라의 기풍을 어지럽혔다.

(환공의 아들들끼리 제위 싸움 때문에 환공은 50일이 넘도록 장례식을 하지 못했다.

나중에 환공의 시체를 보니 구더기가 기어다니고 파리가 끼고 시체냄새가 진동했다고한다.)

 

그래서 환공이 죽고난 뒤 진(晉)에 영원히 패자(覇子)자리를 넘겨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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