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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이 한국을 침공했을 때, 당시의 그리스는 입헌군주제 국가였다.

그리고 당시의 그리스 국왕은 파울로스1세였다. 파울로스1세는 나치 독일의 침공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고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장교 출신이었다.

 

2차세계대전 후, 귀국하여 왕실을 이어나간 그는 강한 리더쉽과 반나치 독립운동의 영웅이라는 경력까지 더해져 군주제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자들까지도 지지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는 본래 나치에 맞섰던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에 우호적인 친서방주의자였고 또 발칸반도에서 범람하는 공산권 세력을 경계하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상황이 비슷하노?) 적극적인 친서방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동안 그리스는 큰 발전을 이룩했다. 이때 한반도에서 공산군이 남한을 침략했다는 정보를 접한 파울로스1세는 (당시는 그리스도 신생국이다보니) 군사력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공산권에 맞선다는 의지를 전세계에 확실히 어필하기 위해 남한을 돕기로 결정한다. 땡큐 유어 마제스티...

 

그리고 파울로스1세의 서거 후,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노스2세가 즉위했다. 콘스탄티노스2세는 문약한 인물이라서 관료들에게 휘둘리기 일쑤였다. 이 사람의 재위 시절 왕실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했고 수상 자리를 놓고 정치인들이 자기들끼리 싸움을 벌였다. 그 혼란은 그야말로 한국의 장면 정부 시절과 견줄만했다.

 

그러다가 그리스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콘스탄티노스2세는 로마로 도망쳤고 군사정권이 끝나자 슬그머니 귀국했다. 그런데 얼마나 콘스탄티노스2세가 홍어좃으로 보였냐 하면, 민정 복귀 직후의 첫 수상이었던 카라만리스가 아예 대놓고 군주제 유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을 정도. 그리고 국민투표에 의해 군주제가 폐지되자 콘스탄티노스2세는 두말없이 또 망명을 선택했다. 그때에는 런던으로 도망쳤다.

 

콘스탄티노스2세 젊을 때.

 

 

한편 그리스가 장면 정부 시절과 같은 혼란기를 겪고 있을 때 두각을 드러낸 사람이 바로 그리스의 망국병을 시작한 그리스버전 슨상님으로 알려진 게르기오스 파판드레우이다. 중우민주주의가 시작된 나라답게 파판드레우는 표를 얻기 위해 물질적 포상을 약속하는 공약을 남발하는 포퓰리즘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수법으로 무려 3번이나 수상에 당선되었다. 그러자 그리스 정치인들은 너도나도 포퓰리즘을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드디어 군부가 나섰다. 그리스 군부는 1967년 쿠데타를 일으켜 파판드레우를 비롯한 정치인들을 쫓아내고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이 당시는 저 얼간이 콘스탄티노스2세도 군부가 친왕파인줄 알고 군부를 지지했었다. 

쿠데타의 중심인물은 게오르기 파파도폴루스 당시 대령이었다. 실은 그리스군에도 똥별들이 많았는데 파파도폴루스 대령은 무솔리니의 이태리군이나 나치독일군과 맞서 전투를 경험한 바 있는 야전장교 출신이었다. 그는 우유부단한 별들을 무시하고 결국 독자적으로 장교들을 포섭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는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전두환이 김대중이나 김영삼의 정치활동을 막았던 것처럼 파파도폴루스도 파판드레우를 가택연금시켰다.

 

 

눈빛 지리노...

 

그러나 파파도폴루스는 원조각하나 엔젤두환만한 경제 능력은 없었다. 그래도 그리스 경제는 미국과 NATO의 지원 아래 ㅅㅌㅊ 발전을 이룩했다. 다만 파파도폴루스는 반대파를 가혹하게 진압하기로 유명했다. 그렇게 막강한 독재권력을 휘두르다가 1972년 부하의 반란에 의해 가택연금 당하고 권력을 뺏기고 말았다.

 

그나마 정치적 안목이 있던 파파도폴루스가 사라지고 나니 이제 그의 부하들이 서로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고려 무인시대 같은 상황이 약 2년간 계속되었다.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음을 우려한 그리스 군부는 상황을 반전할 카드로 1974년 키프로스의 쿠데타를 지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키프로스는 본래 그리스파와 터키파가 나뉘어 대립하는 나라이다. 아니나다를까 터키가 그리스 군부의 쿠데타 지원을 알아차리고 빡돌았다. 터키는 무력시위를 벌였고 그리스 군부는 깨갱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까지 걷어차인 상황을 수습해보려고 민정 이양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물태우가 김영삼과 손을 잡은 것처럼) 그리스 군부는 카라만리스와 손을 잡고 민정이양을 했다.

 

터키군의 압박은 정말 뜻밖이었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지만 어쨌거나 그것이 그리스 민주화를 앞당겼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터키를 "Deus ex machina(그리스 연극에서 기계로 만든 신이 나타나면 알아서 사건이 해결된다는 의미에서 쌩뚱맞은데 일이 해결되는 현상을 지칭. 진중권이 디워를 까면서 디워 스토리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진중권은 똥꼬충 엑스 마리화나ㅋㅋ)"라고 부르게 되었다.

 

암튼 그리스가 민주화 되면서... 군사정권 때 눈치만 보던 포퓰리스트들이 너도나도 활동을 재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파판드레우 가문도 다시 권력을 노리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과거와의 차이라면 과거에는 포퓰리즘을 내세웠던 사람이 파판드레우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파판드레우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정치인들도 포퓰리즘을 내세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버는 돈은 없고, 쓰는 건 많고, 도둑질하는 새키들은 많고, 그런데 문제가 없을 수 있겠냐? 90년대말 그리스 경제는 중력을 따라가는 듯 보이다가... EU에 가입하면서 손쉽게 돈을 빌려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기고만장했지. 올림픽도 개최하고. 그렇게 유럽의 7시놈들은 겁대가리 없이 빚을 풍덩풍덩 져댔고 (물론 그리스가 빚을 진 것은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가 아니라 표를 사기 위해서) 결국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치니까 그리스는 회초리로 맞을 것을 홍두께로 맞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경제난을 마주하고 노무룩해진 그리스 당시 총리 안토니스 사마라스는 긴축 정책을 실시했다.

 

그랬더니 그리스 유권자들은 겨우 몇년 긴축정책 맛보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앙탈을 부리며 2014년에 좌파연합정당의 당수 알렉시스 치프라스를 뽑아놓은 것이다. 뒈질려면 뭔짓을 못해.

축하 좋아한다 미친새키들 ㅋㅋㅋㅋ

지금까지는 그저 부엉이바위에 오르는 과정에 불과했다. 시리자가 집권하면서부터 그리스의 운지는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의 침몰은 지금까지 (미국발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나게 노가리 까던) 분배충들에게는 아가리를 닥치게 하는 결정타나 다름없기 때문에 전세계 진보벌레들은 그리스의 원인을 자꾸 엉뚱한 곳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를 위해 단돈 한푼도 내놓을 생각이 없으면서 독일만 졸라 욕하고 있는 21세기 황건적 피케티.

 

 

즉, 지금의 그리스는 한국을 도와주었던 형제나라가 아니라 한국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진보분배충들이 전력을 다해 쉴드치고 있는 유럽의 7시 국가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리스와 약간 다른 사례를 보자.

 

한국전쟁 때 남한을 도와주었던 나라들 중에는 아프리카 국가 이디오피아도 있었다. 이디오피아는 상징적인 수준이 아니라 실병력도 많이 보내주고 이디오피아군은 용맹하기도 했다고. 그건 군사학 잘 아는 게이들의 정보글에 맡기겠다.

 

암튼 그 당시 한국을 도와주기로 결정하신 분이 바로 이디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국왕이었다.

 

셀라시에 국왕은 무솔리니의 이디오피아 침공에 맞서고, 또 효과적으로 이태리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물론 독일군에 비하면 이태리군이 좃병신집단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유럽의 침략군을 물리쳤다는 점에서는 이디오피아군의 숙련도와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셀라시에 국왕은 친서방주의자였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혁명충들의 위험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프리카에서 반공의 기치를 높이 들고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대한민국을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 되돌아온 용사들은 이디오피아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 동아프리카는 이디오피아뿐만 아니라 에리트레아계, 소말리아계 등 여러 민족이 섞여사는 지역이었는데 셀라시에 국왕은 이들을 모두 잘 회유하여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4년, 공교롭게도 그리스 군사정권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이디오피아에서 공산혁명이 발발했다. 그리고 공산혁명의 지도자인 멩기스투 미리암 소령은 하일레 셀라시에 국왕을 암살(사인은 밝혀지지 않음)하고 공산정부를 수립했다. 그리고 동시에 미국과의 모든 관계를 끊고 소련과의 국교를 텄다.

 

멩기스투 미리암

 

 

그런데 어쩌다가 멩기스투 같은 빨갱이가 이디오피아 군부에서 세력을 형성하게 된 것일까? 본래 본래부터 멩기스투는 소위 고문관 내지는 꼴통이었다. 미국 군사고문관들은 멩기스투가 분노 조절 장애가 있으며 지휘관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를 제대시킬 것을 요구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멩기스투를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고 그에게군 입대까지 권했던 이디오피아 장군 아만 안돔(Aman Andom)은 미군들의 건의를 물리치고 그런 꼴통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군에 남아 소령까지 진급한 멩기스투는 하급장교들을 선동하여 빠른 출세를 약속하였고 그들을 앞세워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군부를 숙청한다는 명분으로 멩기스투는 자신의 은사 안돔 장군을 사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안돔 장군이 출신 부족인 에리트레아 출신들도 대거 숙청하였다. 그 잔인함과 배은망덕함은 이디오피아의 리석기라 할만하다. 

 

멩기스투는 스탈린을 매우 존경하였기 때문에 스탈린을 본받아서 피의 숙청을 벌였다. 군부와 정계의 반공주의자들은 모조리 숙청당했고 '서양 물'이 든 사람들도 숙청했다. 아프리카의 경우, 한명이 숙청당하면 그 사람이 속한 부족들까지도 숙청하는 게 일반적이라서 이디오피아에서는 부족간 갈등이 심해졌다. 그리고 이디오피아는 격렬한 내전에 휩싸이게 된다. 이 결과 에리트레아는 이디오피아에서 따로 독립하게 된다.

 

적화통일된 남한에서 애국할배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마찬가지로 한국참전용사들은 멩기스투 치하의 이디오피아에서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으며 비참한 생활을 강요받게 되었다. 최악의 출신성분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들과 그들의 후손은 농업이나 어업 외에는 그 어떠한 직업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편 빨갱이들이란 대개 무능한 법이다. 타고난 잔인함과 선동능력으로 군부를 장악하고, 빠르게 반대파들을 몰살시켜 권력을 잡았지만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모여 반군 조직을 조직하게 되자 멩기스투는 당황했다. 그리고 이 꼴통은 갈수록 반군에게 밀리더니 결국 반공주의 반군은 1988년, 남한이 서울올림픽을 개최할 무렵, 이디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를 탈환하였다. 이렇게 하여 14여년에 걸친 이디오피아의 공산정권은 몰락하였다.

 

멩기스투 치하의 잔인한 탄압을 잊지 않기 위해 이디오피아에는 Red Terror Museum이라는 (서대문형무소 같은) 박물관을 세웠으며 지금도 이디오피아는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반공국가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이 이디오피아에서 한국전쟁에서 우리를 도와준 희생에 대한 보은 활동을 하고 있는 배경에는 이런 복잡한 역사가 있는 것이다. 이디오피아는 공산정권의 잔인함을 직접 겪은 나라이다.

 

 

한줄요약: 지금의 그리스는 좃되봐야 정신차리지만 지금의 이디오피아는 형제의 나라 맞음.

 

출처 URL

https://han.gl/wlOz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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