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50여년의 일본 센고쿠시대를 통일한 히데요시는,
1. 명나라와의 무역 독점.
2. 평화시대를 맞이한 영주들의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3. 자신이 키운 직속 무장들(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쿠로다 나가마사,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힘을 강화시켜 토요토미 가문의 안녕을 꾀하기 위해.
4. 정복욕
등의 이유로 인해, 1592년,1598년 두차례에 갈쳐 임진왜란 과 정유재란을 일으킨다.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 통솔94 / 무용78 / 지략97 / 정치99
전쟁에서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전투)를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진적이 없던 히데요시. 그는 과연 임진왜란도 승리할 거라 예상했을까?
도요토미 가문의 안녕을 꾀하기 위한 전쟁이 오히려 자신의 가문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미리 짐작했더라면... 그의 판단은 조선과 일본에 무고한 희생자들만
남기게 된다.
코바야카와 다카카게. 통솔88 / 무용74/ 지략95/ 정치95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모략가로 이름을 알린 모리 모토나리의 3남. 코바야카와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가문을 잇는다.
(참고로 그의 양자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편에 서게 되어 도쿠가와 천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임진왜란 당시, 모리가문과 함께 참전. 벽제관 전투에서 타치바나 무나시게와 같이 명나라군에 대승을 거두지만, 이치전투나 행주대첩에서 권율에게 패배하기도
한다.
모리 테루모토. 통솔47/ 무용50/ 지략35/ 정치65
모리 모토나리의 손자. 120만석의 대다이묘. 임진왜란 당시 7군단 대장을 맡았고 주로 경상도 지역이 주무대였다.
주로 보급로를 공금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고령,현풍전투에서 곽재우의 게릴라전에 당하였다.
우키타 히데이에. 통솔82/ 무용73/ 지략72/ 정치73
일본 전국시대의 손꼽히는 모략가인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 50만석의 영주이며, 임진왜란 총사령관으로 전군을 지휘한다.
행주대첩 때, 권율에게 패하게 되는데 중상을 입어 부하에게 업힌채로 퇴각한다.
이시다 미츠나리. 통솔70/ 무용58/ 지략77/ 정치95
히데요시의 최측근으로 임진왜란때는 감찰관으로 활약한다. 행주대첩에도 참가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무단파(카토 기요마사, 쿠로다 나가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에게 통보하지 않은채,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하여 조*명 연합군과 화합을 강화를 교섭하여 극도로 사이가 나빠진다.
이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필두로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시마즈 요시히로. 통솔97/ 무용94/ 지략83/ 정치68
규슈의 절대강자 시마즈가의 당주(히데요시는 큐슈정벌 당시 25만을 이끌고 진격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임진왜란 때는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을 궤멸 시키고, 사천전투에서도 승리를 이끈다.
초쇼카베 모토치카. 통솔93/ 무용86/ 지략89/ 정치86
시코쿠를 통일하고 처음으로 히데요시와 맞섰으나 결국 굴복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모두 참가한다. 주무대는 전라도 였고, 히데요시의 명령에 의해 코베기,귀베기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가토우 기요마사. 통솔83/ 무용91/ 정치70/ 정치70
히데요시의 먼 친척이며, 어렸을 때부터 도요토미 가문의 안녕을 위해 키워낸 인재이다. 시즈가타케의 7본창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천선봉에 섰으며 조선의 왕자들을 포획하는 등의 전공을 세웠다.
북관대첩, 울산성 전투등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울산성 전투에서 갖은 고생을 다해, 자신의 영지 구마모토 성을 전략적으로 축성한것이 유명.
(다다미 아래에 고구마줄기를 심어 식량대용으로 쓸 수 있게 하였으며 우물을 100개 팠다고 전해진다)
고니시 유키나가. 통솔75/ 무용62/ 지략67/ 정치84
상인 출신이며 기독교 신자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최 선봉장이었으며, 부산성 전투를 시작으로 탄금대,평양성 전투 등 많은 전투에 참가한다.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에게 패하여 평양성을 불지르고 서울로 퇴각하였다.
전투 도중, 조*명 연합군과 강화를 교섭하여, 무단파와 극도로 사이가 나빠진다.
히데요시 사망 후 철군명령이 내려지자 노량해전이 벌어지는 틈을 이용해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통솔79/무용90/ 지략54/ 정치52
히데요시의 먼친척으로 어렸을 때부터 전략적으로 키워낸 인재로 무단파의 대표적 무장. 시즈가타케의 7본창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주무대는 경기도였으며 선봉에 섰다. 장문포 해전에서는 이순신과도 싸웠다.
쿠로다 나가마사. 통솔76/ 무용70/ 지략80/ 정치79
히데요시의 전국통일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쿠로다 칸베에의 장남.
임진왜란 당시, 제 3군 사령관으로 황해도 지역을 초토화 시킨다.
히데요시는 칸베에의 능력을 두려워하여, 1등공신임에도 부젠 10만석의 영지를 주었는데, 나가마사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동군편에 섰으며
그 덕분에 52만석의 영지를 받는다.
도도 타카토라. 통솔81/ 무용78/ 지략87/ 정치92
190cm의 키를 자랑하는 거한으로, 몇번이나 주군을 바꿔 '변절자' '권력의 앞잡이'로 소설 등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임진왜란 당시 수군장으로 출전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수군을 이끌고 재차 침입하여 웅천전투에서는 배설과, 칠천량 전투에서는 원균과 싸웠다.
명량대첩 당시, 통제사 이순신에게 대패하여 군선 31척을 잃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통솔59/ 무용68/ 지략44/ 정치36
임진왜란 당시 해상수운 및 수군관련 업무를 맡았고, 후에 육전에도 참가한다.
용인전투에서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조선군 5만과 격돌하였으나 야간에 기습공격하여 패주시킨다.
조선 수군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와 함께 참전하나, 한산도 대첩에서 이순에게 대패한다.
세줄 요약.
1. 히데요시는 자신의 가문의 안녕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2. 전쟁에서 지고, 가문 핵심세력의 분열을 조장한 결과를 초래한다.
3. 임진왜란에 참전 안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결국 일본을 뺏긴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일본 세력 분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