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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위키

 

펠리컨 커여워

 

사다새라는 것은 우리일게이들은 몰르지?. 흔히 펠리칸이라고 알려진 이 새에 순 우리말 이름이 사다새야

우리나라말을 만들었다는 말은 펠리컨이 우리나라에 살았다는 증거가 되지

우리나라 조류도감에는 사다새가 미조로 기록되어 있고 1914년 인천과 1978년 마라도에서 채집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어

하지만 옛 기록을 보면 이 새가 우리나라에 꽤 많이 살았고 조선시대 왕에게 바쳐지던 진상품이기도 했다는 걸 알 수 있어 그래서 이 새가 순 우리말 이름을 가지게 된것이야 신기하지?

사다새라는 한글 이름으로 적힌 문헌은 가장 오래된 것이 석보상절로 한글이 창제되자 바로 적힌 문헌이야 그 외 사성통해,동의보감,시경언해등에 적혀 있어

사다새는 한자로 가람조,제호,도아,도하,오택,이호등으로 불리었어

그리고 이건 어느 지역의 특산물 이라고도 나와있기도해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사다새에 관한 기록이 나와. 세종실록지리에는 도아조유로 나오는데 도아조 기름이 뭔지 잘 몰랐던지 조선왕조실록 번역서에는 그냥 도아조유로 그대로 나오지만 사실은 사다새 기름을 말해.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지방 약재에 도아조기름이 평안도, 황해도, 멍청도, 7시, 경상도에서 나온다고 하고, 지방별로는 평안도에는 용천군/철산군에, 황해도에는 안악군/해주목/장연현/연안도호부/배천군/풍천군/장련현에, 전라도에는 만경현/임피현/옥구현 에 7시에는 나주목/영광군/무장현에서 약재로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어 여기서 멍청도에는 어느 지방인지 안나와 아쉽다ㅠㅠ

 

 

 

 

 

 

사다새 서식지가 서해에 몰려있어 그런데 사다새 기름은 왜 왕에게 진상됐을까? 본초강목을 보면 사다새 기름이 옹종,풍비,이롱에 효과가 있대 동의보감에도 사다새 배 아래 기름덩어리를 달여서 누창과 음식창, 악창이 생겨서 잘 낫지 않는곳에 바르면 좋은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나와 있어(함 발라보고 싶노) 본초강목에는 사다새 부리에 대한 글도 있는데 맛이 짜고 감질에 좋다고 나와 있어 이러한 이유로 사다새가 왕에게 진상되었던거야

 

그러면 왜 지금은 볼 수 없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알 수 있어

 

명종 1년 12월 9일 (1546년)
시독관 김개가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전라도에 있을 때에 들은 바로는 ‘사다새의 살을 취하여 약으로 사용하므로 전라도의 해변 7읍(邑)에서 윤번으로 진상한다.’ 하였습니다. 당초의 생산 여부는 알지 못하지만 지금은 생산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1년에 1읍에서 진상하는 것이 한 마리에 불과하지만, 그 지방의 산물(産物)이 아니므로 그 값이 매우 높습니다.
진상할 차례가 돌아온 읍에서는 매년 백성들에게 그 값을 징수하여 평안도 산지(産地)에 가서 사옵니다.
또는 서울 상인이 사다새를 구한 자가 있으면 먼저 바치고는 그 고을에서 값을 받기도 합니다. 들은 바로는 ‘평안도에서는 이 새가 많이 생산되므로 해마다 진상할 때 으레 봉진(封進)하고 남는 2마리가 있는데, 서울 상인으로 먼저 바치는 자가 반드시 이것을 구걸해다가 이익을 본다.’고 합니다.  그 봉진하고 남는 것을 헛되게 버릴 바에야 생산되지 않는 곳에서의 진상을 면제해 주고 평안도로 하여금 봉진하고 남는 2마리도 아울러 진상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김개 얘기로는 전라도 해변가 7개 읍에서 돌아가면서 진상하였는데 지금은 더 이상 안잡혀서 평안도에서 사와서 바친다는 이야기야

 

다음날 명종은 재상들과 이에 대해 얘기하는데 영의정 윤인경이 아뢰기를

"사다새의 기름에 관한 일은 모든 생산물이 혹 옛날에는 있던 것이 지금은 없기도 하고 혹 옛날에는 없던 것이 지금은 있기도 하니, 경솔하게 고칠 수 없습니다. 또 평안도에서 많이 생산된다고 말하나 이기(李芑)가 일찍이 평안 감사가 되었을 때에 보니, 사다새는 평안도에도 희귀하였습니다. 지금 만일 전라도에서 진상하던 것을 평안도로 옮겨 배정한다면 평안도의 폐단이 어찌 전라도와 다르겠습니까.“

라고 하였여. 이에 명종은 아뢴대로 하라고 했다고 했지.

 

즉 전라도뿐만 아니라 평안도에서도 이때는 사다새가 이미 희귀한 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1년전 기록을 한번 보자

선조 14년 (1581년)
내의원이 평안도 사다새 기름을 때맞추어 올려보내지 않는다고 하여 글을 내려 독촉하자고 청하였는데, 민폐가 극심할 것이니 아직
하지 말라고 전교하였다.

명종때부터 40년도 안되었지만 평안도에서 사다새 기름을 진상하지 않는다고 독촉할 정도였다니 아마도 이때 이미 멸종의 길을 가고 있었던듯 하나봐

이 이후로 실록을 비롯한 정사에서 사다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ㅠㅠ

 

하지만 나는 다른 글에서 사다새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퇴계문집 2권에 “사다새는 객에게 시름을 자아내네” ,라는 글이나 택당 이식(선조~인조)의 택당집에 “촌 막걸리 재촉하는 제호려 소리로세” 라는 싯구절이 있고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 “사다새는 무엇을 생각하길래 종일토록 턱밑살 늘이고 있나” 외에 몇 개의 사다새가 들어가는 싯구가 보이는데 이것이 그냥 시적 표현인지 실제로 사다새를 보고 지은 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 외 연암 박지원의 담연정기에도 사다새를 보고 쓴 글이 나오는데 글 내용으로 봐서는 사다새가 아니라 왜가리나 백로 종류같아 보여

 

그렇지만 사다새를 목격한 확실한 기록이 있으니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 그 기록이 있어

(출저:네이버 지식백과)

 

 

 

성호사설 만물문 제호(鵜鶘)
내가 바닷가를 지나다가 큰 새 한 마리가 방죽에 떠 있는 것을 보았다. 빛깔은 희고 생김새는 거위와 비슷하며 크기는 갑절이 되었는데, 속명 풍덕새[豊德鳥]라는 것이다. 마침 사냥하는 자가 총을 쏘아서 잡았다. 나는 옆으로 다가가서 세밀히 살펴보았더니, 주둥이는 긴데도 뾰족하지 않고 아래 입술에는 다만 주곽(周郭)이 있어 아래로 늘어진 턱까지 이어졌다. 아무 물건도 담긴 것이 없고 텅 빈 채로 가슴까지 드리워졌는데 물을 넣으면 큰 사발로 하나쯤은 들어갈 만하였다. 그 속에는 사충(沙蟲)의 피육(皮肉)이 담겨져 있었다. 이것은 호중(胡中)에서 생장한 것인데 새 역시 별것이 아니었다. 추측컨대, 이 새는 사다새 따위인 듯하다.

글의 묘사를 보면 이익의 추측대로 사다새가 분명하지? 당시 이익이 살던 곳은 현재의 안산시 성포동 부근으로 지금은 간척이 되어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당시에는 바닷가 개펄에 접해 있었어 내가 확인한 바로는 이 기록이 사다새에 대한 확실한 목격담으로는 조선시대 마지막 기록이야

그리고 1914년 길 잃은 사다새가 발견될때까지 사다새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더 이상 못찾았어

 

아마도 18세기까지 서해에 날아오던 사다새는 약으로 쓰기 위한 남획으로 조선시대 후반에 완전히 멸종된것 같다. 그리하여 지금은 조류도감에 우리나라에는 서식하지 않고 철새로 이동하다 수십년에 한번 길을 잃어 목격되는 새로 기록되어 버렸고 '사다새'라는 순 우리말 이름도 잊혀져가고 '펠리칸'이라는 영어 이름이 더 익숙한 새가 되어버린거야

 

 

 

 

3줄요약

1.한국에도

2.펠리컨이

3.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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