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8일, 뤼순항에 주둔한 러시아 극동함대를 일본제국 연합함대가 기습공격했다.
러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은 공격 두 시간 뒤 선전포고했다.
<뤼순항 기습공격 항적도, 방위성 방위연구소 소장>
연합함대는 야간 00시 20분부터 어뢰공격을 퍼붓고 철퇴했다.
러시아 함대는 전함 2척이 대파, 보호함 1척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으로부터 37년, 줄기차게 근대화와 국력향상에 힘써왔으나
아직은 구미열강에 비하면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온건파들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협상에 나섰고
러시아 또한 굳이 무력충돌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뤼순, 다롄을 러시아가 점령하고, 의화단 폭동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러시아 극동군이 만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만주와 한반도의 주도권을 갖고자 끊임없이 대립하던 두 제국의 협상은 결렬됐고 2월 4일 어전회의에서 대러개전이 최종 결정됐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제독은 휘하 함대를 몰아 뤼순항을 봉쇄하고
최종적으로는 러시아 극동함대를 격멸하기 위해 작전행동에 들어갔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
8일 시작 된 야간 기습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러일 양국의 해전이 펼쳐졌다. 어뢰와 함포사격을 동원한 양국의 해전은 이렇다할 성과 없이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고 12일, 인천에 일본군 12사단이 상륙하고 한성을 점령했다. 사실상 한반도는 일본의 통제하에 떨어졌다.
도고는 뤼순항을 완전 봉쇄하기 위해 여순항폐색작전을 발동, 시멘트를 가득 채운 증기함을 항 가까이에 침몰시킴으로써 항구를 완전 봉쇄하고자
했으나 이를 눈치챈 러시아 해안포대의 포격과 러시아 해군의 요격으로 사상자만 내고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이 시기, 일본군의 야습을 허용하고 무능으로 낙인찍힌 오스카 스탁 제독이 파면되고 마카 로프 중장이 새로이 극동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스테판 마카로프 Степа́н О́сипович Мака́ров>
근대적 해전에 조예가 깊고 성숙한 인품으로 장병들의 존경을 받던 마카로프는 부임하자마자 극동함대의 해이해진 군 기강을 쇄신하고
직접 모범을 보이며 장병들의 사기를 독려했다. 철저히 해안 포대의 지원사격을 받는 방어 위주의 전략을 구사하면서도 초계정을 이용한 탐색전으로
끊임없이 일본해군에게 출혈을 강요하는 등, 기존의 수세적 입장에서 공세적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뤼순항 앞바다에서 마카로프가 탄 기함이 기뢰를 건드려버렸고 기함은 대파, 마카로프는 전사하고 만다.
분위기는 단번에 돌변, 8월, 도고는 황해해전에서 극동함대를 격파하며 잔존 적 함대를 뤼순항에 처박아버렸고 사령관이 기뢰에 전사한 것에 겁을 잔뜩 먹은
러시아 해군은 뤼순항의 해안포에만 의지 한 채 틀어박혔다.
<황해해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청도로 몸을 피한 전함 체사레비치(Tsesarevich)>
그리고 육지에서는 5월, 압록강 전선에서 러시아 육군은 일본 제 1군에게 패배하고 압록강 방어선은 붕괴된다.
이어 5월 25일, 요동반도에 상륙한 일본군 제2군은 곧바로 남산요새에 들이닥쳤고 요새를 함락시켰으나 4000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낸다.
대본영에서는 뭔가 숫자가 잘못된 게 아닌가 의심했으나 숫자는 사실이었다. 러시아 군이 지키는 요새는 10년전 청일전쟁 때의 오합지절 청군이
지키던 요새들이 아니었다. 근대적인 화기와 콘크리트 방어벽, 철조망 등으로 겹겹히 보호 되고 있는 방어선이었다.
<압록강 전역에서 포로로 잡힌 러시아군 포로들과 일본군 장교들의 다과회
어찌됐든 일본은 만만치 않은 출혈을 입으면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극동방면 러시아 육해군의 총체적 위기를 본국에서도 손 놓고 보고만 있지만은 않았다 마카로프의 전사로 해군이 뤼순항에 틀어박힌 신세가 되자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2세는 발틱함대의 극동파견을 결정하고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Zinovy Rozhestvensky) 제독을 사령관으로 삼아
희망봉을 거쳐 극동 해협으로 지원, 남아있는 태평양 함대와 합세하여 제해권을 탈환하도록 했다.
일본은 다급해졌다. 사실 제해권을 가지고 있고 승기를 가져오고 있다고는 하나 일본군의 피해 또한 분명 만만치 않았다. 절대적 우위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발틱 함대까지 전장에 가세한다면 제해권을 지켜낼 수 없었다. 어떻게든 발틱함대가 오기전에 태평양함대를 끝장내버려야했다.
해군 단독으로 뤼순항의 봉쇄와 태평양함대 격멸을 고집하던 해군도 여순항폐색작전이 대실패로 돌아가고
이렇다할 성과가 없자 결국 육군과의 공동전선을 수락한다.
뤼순항 공략을 위해 새로이 군이 재편성 되고 만주군 총사령부가 현지에 설치되어 지휘권이 대본영에서 현지 사령부로 이양되었다.
만주군 휘하에 1군, 2군, 3군 , 4군 이 편성되고 뤼순항 공략은 지난 청일전쟁때 뤼순공략에 성공한 경력이 있는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 대장이 지휘하는
3군에게 맡겨졌다.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 >
이미 전역한 상태였으나 뤼순 공략 경험을 이유로
다시 복직되었다.
작전계획이 수립되고 뤼순 요새 총공격 지시가 떨어졌다. 8월 16일 뤼순 요새 수비병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나 거절되고
8월 19일, 제1차 뤼순 총공격이 시작됐다.
3군 휘하 9사단, 11사단 5만명이 요새의 동북전면, 이용산과 동계관산의 양 포대 사이를 돌파하고자 했다.
<1차뤼순총공격>
그러나 뤼순 요새는, 러시아군이 부르는 Port Arthur는 결코 만만치 않은 요새였다.
요새의 주 방어선은 20만톤의 시멘트를 쏟아부은 콘크리트로 굳힌 반영구적 보루 8개를 중심으로 보루 9개, 영구 포대 6개,
모서리면의 성보 4개와 그것을 연결하는 참호, 모든 방향에서의 공격에 대비해 후방의 언덕에 포대를 건설, 지원 포격을 하게 했다.
요새 전면 침공 예상 방향에는 지뢰밭과 철조망을 산더미처럼 깔아놨으며 전면과 양측방에는 맥심기관총과 각종 최신 속사포들을 배치해 놓은 상태였다.
<맥심기관총>
분당 600발의 사격속도를 자랑하며 1문만으로도 1개중대에 맞먹었다.
<영화 203고지>
공격은 대실패했다. 공격개시 1시간 만에 7연대장 오오우치 모리시츠 대좌가 전사했고 9사단과 1사단의 돌격은 돈좌됐다.
일시적으로 보루와 망대를 점령하기도 했으나 주위의 포격과 러시아군 예비병력의 역습으로 얼마 안 가 격퇴당했다.
24일, 도저히 전황을 타개할 자신이 없는 노기는 후퇴를 명령했다.
전사자 5,017명 부상자 10,843명 총 사상자 15000명에 달하는, 한 개 사단 병력이 6일만에 통째로 사라졌다.
.해군은 육군에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해군이 바라는 것은 요새의 함락이 아니다.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쫓아내주기만 하면 된다. 요새의 203 고지에 전 병력을 집중해 일시에 점령하고
거기서 관측사격으로 뤼순항을 포격한다면 태평양함대는 바다로 기어나올 수 밖에 없을 것. 203고지를 점령하라.
해군의 간절한 부탁에 육군은 간단히 응답했다.
<NHK 드라마 언덕위의 구름>
육군으로서는, 자신들의 대러 전략도 수정하고 일부러 없는 군을 새로이 만들어 뤼순 요새에 투입시켜줬건만
조금 작전이 늦어졌다고 독촉이나 하고 간섭이나 하려는 해군이 좋아보일리 없었다.
그러나 독촉은 해군만이 아니었다 대본영에서도 하루가 멀다하고 빨리 요새를 함락시키라고 전보가 날아왔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기존의 돌격전술의 문제점을 궤뚫어본 육군 기술심사 부장 아리사카 나리사키有坂 成章(아리사카 소총의 개발자)가
본토의 해안방어용 거포인 28센티 유탄포를 철도와 해로로 수송해서 뤼순 공략에 포함시키려 했다.
현지 사령부 참모 이치지 고스케는 그 거대한 포의 포상작업과 시멘트 작업이 얼마나 귀찮고 오래 걸리는지 알았기에 필요없다고 답했지만
아리사카는 무시하고 보냈다 (..)
<이렇게 생긴 포다>
나 같아도 귀찮을 것 같다......
<2회뤼순총공격>
9월 19일, 요새에 대한 두번째 공격이 시작됐다. 점령한 보루와 진지를 강화하고 참호를 파고 동북방면의 진지에 공격을 개시했다.
17 시경부터 남산 및 203 고지 에 2 개 연대 4,000 명에 의한 공격이 이루어졌다.
20일, 남산진지는 단 10분 점령하고 역습에 격퇴되었고 203 고지에서 격전으로 서남보루를 일시 점령하지만 동북 보루의 러시아군과 포격전이 이루어진다.
21 일에는 예비대가 고갈된 일본군은 격렬한 총화에 공격재개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22 일 10 시까 지 6 번에 걸친 동북 보루에 대한 공격은 모두 실패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2차뤼순총공격은 10월 30일까지 이어졌다>
28센티 곡사포의 위력적인 유탄은 분명 러시아군의 피해를 가져왔으나 전략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기존의 돌격전술은 그대로였고 2차총공격의 성과는 P포대 하나를 점령했을뿐, 당초 목표했던 3개 포대 동계관산포대, 반룡산 포대, 이용산포대는
끝내 공략하지 못했다. 명백한 실패였다.
2차총공격은 4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사상자.
아침에 눈을뜨면 한개의 연대가 사라져있고 사흘밤을 자면 사단이 사라져있었다.
대본영은 믿을 수 없는 피해에 경악하면서도 노기와 참모 이치지 고스케를 경질하지는 않았다. 묵묵히 탄약과 포탄, 병력을 증원해주고 있었다.
본토의 정예 7사단이 새로이 증원되어 왔다.
일본육군은 예비대란 예비대는 모조리 쥐어짜내어 여순에 투입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이 뤼순 공격에 지는 날에는 일본은 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절망감은 누구나 다 품고 있었다.
11월 26일, 노기는 3차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3차총공격에는 흰띄를 두른 결사대 백거대白?隊가 결사적 돌격을 감행했고 당연하게도 전멸했다>
11월 27일, 노기 마레스케는 당초의 전략을 수정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뤼순항의 주둔한 러시아 함대의 굴뚝 연기 한 자락도 보지 못한채
전 군이 여기서 전멸할 노릇이었다. 해군의 건의대로 203고지만은 어떻게든 탈취해야했다. 1사단에 명령이 떨어졌다.
전력으로 203을 공격하라. 모든 화력을 고지에 집중하라.
<일본군 1사단은 필사적으로 공격했다. >
지뢰밭에 다리가 터지고 철조망에 걸려 허우적대다 기관총에 제물이 되더라도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 결사적인 돌격에 203고지의 러시아군은 경악을 넘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요새 주위에 쌓인 일본군의 시체는 몇달을 넘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부패하는 시체가 풍기는 악취는 심각했다.
러시아 병사들은 나프탈렌을 묻힌 손수건을 코로 가리고 싸웠다.
30일, 결사적인 돌격에 하늘이 감동했을까? 무라카미 연대가 22시, 203연대의 탈취에 성공한다.
그러나 연대의 남은 병력은 불과 40명. 탄약과 병력의 지원은 없었고 다음 날 새벽 다시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12월 1일, 보다못한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 대장이 열차를 타고 뤼순요새에 도착한다.
답답한 상황에 고다마는 지휘권을 인수하고 직접 공략에 나선다.
<니네 도대체 뭐하냐?>
고다마 대장은 도착하자마자 이치지 고스케 참모를 비롯 참모진을 강하게 질타한다.
그러나 정작 총사령관 노기는 친구라 껄끄러운지 "자네 지휘권 며칠만 빌려주면 안될까?" 로 지휘권 인수
고다마 대장은 지휘권을 인수하자마자 공략 전략을 변경했다. 기존의 돌격전술을 버리고 28센티 유탄포의 포격지휘를 받으며
공략 성공후에는 24시간 주야로 15분 간격으로 원호사격, 아군 오인사격이 위험이 컸지만 고다마는 강행시켰다.
진지변환과 포상 작업에 3일이 걸렸고 4일 이른 아침, 드디어 뤼순요새공략의 대단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군의 포화를 무릅쓰고 돌격한 결과 마침내 고지 정상에 일장기가 휘날렸다.>
"여기는 고지정상, 고기산은 응답바란다!"
"여기는 고기산, 거기서 뤼순항이 보이는가? 러시아 함대가 관측되는가?"
"..........보인다! 훤히 보인다! 각함! 똑똑히 관측가능함!"
사령부는 환호했다. 곧바로 관측정보대로 함대에 포격을 실시했다. 태평양 함대는 전멸했고 살아남은 함은 도망쳤다.
203고지가 함락되자 그동안 버티고 있던 포대들은 차례차례 쓰러져갔다.
203 고지 방어에 예비대를 쏟아부었던 러시아군은 항전의지를 잃었고 1월 1일, 스테셀 사령관이 노기에게 항복한다.
장장 10개월에 걸친 뤼순 공략이 마무리되었다.
<항복한 스테셀 사령관 이하 러시아 사령부>
여순공략에 투입된 일본군 총병력은 13만 총 사상자는 6만명에 이르렀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이 노기에게 저주섞인 편지와 규탄을 보내왔고 노기는 할복자살하려 했지만 메이지 천황은 기를 쓰고 말렸다.
그러나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고나자 아내와 함께 기어코 자살한다.
참담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나 뤼순항 공략은 성공했고 태평양 함대는 격멸했다.
요양과 봉천에서 러시아 주력 육군을 격퇴했으며 만주 전역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왔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 최강의 해상전력 발틱 함대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