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좌좀들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체게바라.
특히 자칭 깨시민들은 체게바라 사진을 자기 블로그에 붙여놓고 혁명가 행세를 하는데...
사람들은 과연 체게바라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냥 잘생긴 얼굴에 속아 체게바라 빠는 건 아닐까?
1. 체게바라는 천식환자였지만 체력이 뛰어났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아르헨티나 태생. 부모는 아르헨티나 중산층 출신인데 둘다 사회주의자라서 요즘으로 치면 강남좌파 2세. 태어날 때부터 천식을 앓았는데 천식을 이겨내기 위해 어릴 때부터 럭비, 축구, 수영 등 운동을 많이 했다. 천식환자라서 체력이 약할 것 같지만 어릴 때부터 워낙 운동을 많이 해서 육체의 강건함은 게릴라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였음.
2. 체게바라는 극도로 잔인한 인물
체게바라는 멕시코에서 만난 카스트로 형제와 함께 쿠바에 잠입하기 전에는 실전경험이 없었다. 당시 멕시코에서는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게릴라들이 많아서 게릴라 훈련을 받기가 비교적 쉬웠다. 쿠바에 잠입한 후 피델 카스트로는 체게바라가 실전 경험이 없는데도 태연히 사람을 쏴죽이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체게바라는 바티스타 정부군과의 교전 후에는 시체들의 총상을 살펴보며 자신의 사격 솜씨를 점검했다고 할 정도.
체 게바라는 의대생이었기 때문에 게릴라들의 치료도 담당했는데 마취를 일부러 안하는 건지 까먹는 건지 하여간 마취를 안하고 집도를 자주 해서 게릴라들이 엄살을 부릴 엄두를 못냈다고 한다.
나중에 쿠바 혁명이 성공하자 체게바라는 직접 라카바냐 형무소의 소장이 되어 인민재판소를 설치하고 '반혁명분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다. 그 자신도 사형집행조에 참여되어 직접 사살을 집행했다.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인민재판이 약 3개월 정도 계속되자 결국 카스트로는 체게바라에게 친선대사 자리를 주어 국외로 보낸다. 너무 사형을 많이 집행했기 떄문이다. 라카바냐 형무소는 지금도 쿠바에서 제일 유명한 형무소로 공포의 상징.
3. 쿠바 혁명의 성공은 체게바라의 군사적 재능이 아니라 카스트로의 정치적 역량과 바티스타 정권의 무능 탓
몇십명에서 시작한 게릴라에 의해 붕괴된 바티스타 정권은 극도로 부패했고 미국에서 교육받은 교관들은 대도시를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다른 온건파 사회주의 계파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로 하여금 대도시에서 파업과 데모를 일으키게 하여 바티스타 정권을 혼란시켰다. 무장봉기를 신봉하는 체게바라는 카스트로의 연합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 바티스타는 비록 군인이긴 했지만 군대 지휘 능력이 너무 무능하여 미국 교관들도 바티스타에 대해서 불신을 가졌다. (전두환이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같은) 진짜 야전사령관 출신이 나라를 다스렸다면 게릴라는 금방 진압되었을 것이다.
체게바라는 탁월한 기동력 덕분에 산악전에 능했다는 것 뿐으로 군사적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나중에 체게바라가 사살되는 볼리비아에서는 CIA가 고용한 나치 전범 출신의 게릴라 전문가 클라우스 바비라는 교관이 참여하여 체게바라의 게릴라를 격파했다.
4. 체게바라가 쿠바를 떠난 것은 떠날 수 밖에 없었기 때문.
한국 좌좀들이 체게바라 빠는 이유 중의 하나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쿠바를 떠나 혁명을 위해 다른 나라로 떠났다는 것인데... 사실 당시 쿠바에서는 체게바라의 입지가 없었다. 당시 내무부 장관으로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던 체게바라는 황당하게도 '혁명의 형제애에 입각한 무상원조'를 소련에 요구했는데 당연히 거절당한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을 마련하지 못해 서독과 일본과 협상한 것을 게이들도 잘 알 것. 체게바라에게는 그 정도의 외교력이 없었다) 순진하고 세상물정 모르던 체게바라는 이번에는 혁명정신에 입각한 자원봉사에 의한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지만 쿠바인들이 보수도 없이 일해야 하는 환경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흐지부지 실패. 경제개발의 실패로 체게바라의 입지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카스트로가 미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자 소련에 앙심을 품고 있던 체게바라가 반발하고 나섰다. 결국 카스트로의 중재로 체게바라는 쿠바를 떠났다.
5. 체게바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
게바라 빠돌이들이 수시로 인용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은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쿠바의 내무부 장관, 친선대사 등으로 활동할 당시 체게바라는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과 활발히 교류했고 체게바라에 대한 칭찬 일색의 평가는 이 무렵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체게바라는 (백인우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흑인들을 몹시 싫어했다. 쿠바를 떠나 콩고에 정착한 체게바라는 제2의 쿠바 혁명을 꿈꾸며 게릴라 양성에 나서지만 현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몇개월만에 동유럽으로 사실상 도망친다. 체게바라가 콩고에서 실패한 이유로는 그가 흑인들을 강압적으로 다루고 (남미에 비해 계급투쟁에 대한 필요성을 별로 인식하지 못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경멸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어느 정도 말이 통하는 라틴아메리카 사람 아니면 자기를 처음부터 우러르며 접근하는 유럽인들 이외에는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이다.
6. 유괴도 불사
콩고에서 실패한 체게바라는 다시 남미로 표적을 잡고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는 볼리비아로 떠난다. 그런데 쿠바에서는 현지인들에게 교육과 의료를 베풀며 교류할 시간이 충분했던 반면 볼리비아에서는 그럴 여유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CIA가 무장 혁명의 움직임을 감지했기 때문에 볼리비아의 미군 병력이 증강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체게바라는 게릴라 병력을 늘리기 위해 원주민들의 마을을 기습하여 남성들을 유괴했다. 이것은 체게바라의 치명적인 실수로 원주민들이 정부군에 협력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주민들의 비협조로 인해 체게바라가 볼리비아 정부군에 체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공산주의는 10억명을 죽였는데 내가 얻은 거라곤 이 좃같은 티셔츠 뿐이랑께>
7. 그 외
체게바라는 극단적인 반미주의자였다. 그는 미국과 조금이라고 연관이 있는 것은 모조리 금지하고자 했다. 특히 종교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이었고 사상 통제를 위해 금지서적을 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스포츠인 야구만은 손대지 못했다. 쿠바 사람들(카스트로도 포함해서)이 워낙 야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카스트로가 체게바라에게 놀라울 정도로 우호적이었던 것은 개인적 친분도 있지만 역시 체게바라의 광기를 통해 혁명에의 추진력을 얻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을 보지 못하고 이상에만 매달리느 체게바라가 소련에게 대놓고 적대적으로 나오자 카스트로도 체게바라를 실각시킬 수 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이례적으로 카스트로는 체게바라를 숙청하지 않았다. 확실히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사이에는 우정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참고서적
<책을 불태우고, 음악을 금지하고, 흑형들을 미워하고, 동성애자들을 죽여라. 그러면 (체게바라처럼) 희망과 자유의 상징이 된당께요>
세줄요약
1. 체게바라는 독선적이지만 정작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2. 그는 또다른 공산주의 국가의 압제자로서 폭군의 특성을 두루 갖고 있었다.
3. 체게바라 빠는 새키들 이런 거 알고 있기나 했더냐? ㅋ 체게바라 빨지 말고 박정희 대통령부터 제대로 압시다.
일면 알수록 존경스러운 분: 박정희 대통령
알면 알수록 실망스러운 인간: 체 게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