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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실화 / 흑인 / 인종차별 ] 미국은 과연 백인 우월국가일까? 학생을 보호하라 - 

"리틀록 나인 사건" - Little Rock Nine

 

 

"흑인학생들의 등교를 군대가 보호하다. 리틀록 나인Little Rock Nine 사건"

 

 

1954년, 미국 대법원은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재판에서 「분리하되 평등하다 라는 개념이 태생적으로 위헌이라는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

 

시설만 평등하다면 인종을 분리시켜도 연방헌법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는 1896년의 플레시 대 퍼그슨 판례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무리 시설이 백인학교와 다를바 없이 평등하다 하더라도, 인종을 분리시켜 교육시킨다는 그 자체가 차별이라는 결정이었다.

 

얼 워렌 대법원장은 남부의 주 정부의 인종분리 정책을 취하고 있는 공립학교들에게 통합 명령을 내렸다.

 

 

 

 

소송을 걸었던 올리버 브라운은 집 가까이에 있는 백인학교를 놔두고 흑인학교를 다니기 위해

 

철길 건너 1마일이나 걸어가야 했던 딸의 아픔을 그제서야 달래줄 수 있었다.

 

 

 

올리버 브라운 목사

 

 

 

백인학교에 등교한 딸 쉐릴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이제 법적으로 완전한 위법이었다. 이 판결은 미국 전역의 흑인들을 감격케 했다.

 

「분리하되 평등하다 은  구시대의 잔재였다. 「분리하면 무조건 불평등  이라는 새로운 법리가 탄생했다.

 

 

 

 

법적으로는 평등할지라도 철저하게 백인과 흑인의 자리가 구별되던 인종차별의 시대에

 

드디어 공교육의 인종평등이 이루어진 것이다.

 

 

 

 

 

 

 

 

 

 

 

 

 

 

 

 

 

 

전미 유색인종 협회(NAACP)는 이 판결을 근거로 특별히 우수한 성적과 태도를 기준으로 뽑은

 

아홉명의 흑인 학생들을 아카소 주  리틀록 센트롤 하이스쿨(Little Rock Central High School)에 진학시켰다.

 

이들의 입학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보수적인 학교 이사진은 난색을 표했다.

 

 

 

 

 

 리틀록의 백인사회 또한 격렬하게 반발했다. 대법원의 분리 교육 통합정책을 비난하며

 

흑인 학생들의 백인학교 입학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들었다.

 

 

 

 

 

 

1959년 8월 리틀록 시민들의 학교 통합 정책에 대한 반대 시위

 

 

 

 

1959년 8월 20일 아칸소 주 주지사 오발 포버스(Orval Faubus)가 주의회 의사당 앞에서 모인 

 

군중들에게 통합 정책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남부맹방기를 손에 든 백인들이 경청하는 중

 

 

 

 

 

 백인여자의 파켓시위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시위는 격렬했고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다. 아칸소 주 주지사 오발 포버스는 대놓고 이들을 지지했는데

 

주 의회 의사당 앞에서 대법원의 판결과 통합정책을 비판하는 등 결코 리틀록 나인 (little rock nine)의 입학을 좌시하지 않을 태세였다.

 

 

 

9월 2일, 개학이 가까워졌고 오발 포버스 주지사는 주 방위군 270명을 동원해 학교를 포위했다.

 

명목상으로는 흑인 학생들의 등교로 인한 시민들의 폭력적인 대응을 예방한다는 구실이었지만 사실상 이는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절대 허가 할 수 없다는 결의 표명이었다.

 

 

 

 

9월 4일, 9명의 흑인 학생들은 학교에 들어가고자 했지만 군인들의 저지로 발길을 돌려야만했다.

 

돌아서는 그들의 주위로 수많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모욕적인 욕설과 위협을 가했다.

 

 

 

 

 

 

흑인 학생 중 한명인 엘리자베스 엑포드(Elizabeth Eckford)와 그녀를 따라다니며

 

계속 모욕을 주는 헤이잘 브라이언(Hazal Bryan)

 

 

 

 

 

 

 

 

엘리자베스 엑포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떤 사람은 죽여라 죽여! 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우리를 도와줄만한 사람을 애타게 찾았다.

 

친절해 보이는 얼굴의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 순간, 그녀는 나에게 침을 뱉었다."

 

 

 

 

 

 

 

 

 

주지사의 강경한 태도에 교육위원회는 당황했고 연방 판사는 주지사에게 압력을 가했다.

 

주지사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9월 10일, 법무장관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주지사의 직무정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또한 주지사의 도 넘은 행위를 비판했다.

 

9월 20일, 연방판사와 대통령의 압박에 견디지 못한 주지사는 군대를 철수시켰으나 

 

9월 23일, 등교한 흑인학생들에게 백인 군중들이 경찰의 폴리스라인들 돌파하여 위해를 가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분노했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이미 상황은 지방 주의 행정력에서 해결할 수 있는 범위를 넘었다.

 

리틀록 시장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연방군의 투입을 요청했고 대통령은 즉각 승인했다.

 

2차대전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최정예 부대인 101 공수사단 1000명이 리틀록 시로 파견됐다.

 

 

 

 

아칸소 주 방위군은 연방군에 편입시킴으로써 주지사에게서 군사력을 빼앗았고 공수부대원들과 주방위군 1만명이 즉각적으로

 

사태의 통제에 들어갔다. 학교 주위에 진을 치고 있던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시위대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학교로 투입되는 연방군

 

 

 

 

 

착검한 부대원들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쫓아내고 있다.

 

 

 

 

 

 

 

 

 

 

 

 

 

학교를 통제하는 연방군

 

 

 

 

 

 

흑인 학생들이 군인들의 경호를 받으며 등교하고 있다.

 

 

 

 

 

 

 

 

 

 

하교 후 귀가 에스코트까지 완벽

 

 

 

 

 

 

 

연방군은 9명의 흑인 학생들을 등교를 철저히 보호하며 학교를 통제했고

 

수업 중에는 학교 밖에서 대기하며 지키고 하교 시에도 집까지 에스코트했다.

 

 

리틀록 시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완전히 마음을 접고 포기할 때까지 이들의 경호는 계속됐고

 

리틀록 나인 학생들은 이들의 경호아래 무사히 학교를 다녔다.

 

 

 

 

 

 

 

 

 

학교 내의 백인 학생들과 선생들의 차별과 모욕은 여전했으나 리틀록 나인의 학생들은 꿋꿋이 견디며 학업에 열중했다.

 

 

 

 

1958년, 1년의 시간이 지나고 어니스트 그린(Ernest Green)은 리틀록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리틀록 중앙고 최초의 흑인 졸업생이었다.

 

그의 안전을 우려한 교장이 졸업장을 집으로 보내주려고 했지만 그는 정중히 거절하고 당당하게 학교에서 졸업식을 치뤘다.

 

 

 

 

 

리틀록 나인은 흑인 인권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불평등과 부조리에 당당히 맞서고 고난 속에서도 당당히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한 흑인민권운동사의 상징으로 기념되고 있다.

 

 

 

 

 

 

 

 

리틀록 나인 기념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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